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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영 nonie Apr 17. 2017

나지막한 담벼락에서, 낯선 하룻밤

호텔여행자가 한옥을 만났을 때 

스토리가 있는 숙소에 눈을 돌리다

서울에서 태어나 3n년을 넘게 자란 나는 문명의 혜택을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전형적인 도시여행자다. 해외여행 전문가로 전국을 돌며 강의를 하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도시 밖으로 떠나는 여행은 가급적 꺼려 왔다. 그런 내가 호텔이라는 주제에 빠져 전 세계를 돌며 수년간 호텔여행자로 살아온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행과 직업이 완전히 일치된 나에겐, 호텔이야말로 또 하나의 집과 같은 존재감을 가진다. 


하지만 전 세계의 날고 긴다는 호텔을 두루 경험할수록, 숙소를 선택하는 기준은 점차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투숙객을 받기 위해 지어진 규격화된 호텔보다는, 도시의 시간과 이야기를 담은 건축물에 묵는 것이 '그 도시와 가까워지는 여행'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해외에서만 이런 여행이 가능한 걸까? 반문해 보니 우리에게는 오랜 이야기를 지닌 집, '한옥'이 있다. 기회가 되면 제대로 된 한옥에서 머물러 보고 싶었다. 


마침 대구에 출장이 잡혔고, 이때다 싶어 곧바로 한옥 숙소 검색에 들어갔다. 서울과 경주, 전주의 한옥마을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대구에 한옥 골목이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한옥 게스트하우스 몇 곳을 수소문해 예약을 시도했지만, 생각보다 좋은 숙소를 고르는 일은 여의치 않았다. 여동생과 4살짜리 조카가 동행하는 가족여행이라 화장실이 딸린 독채여야 하는데, 공용 화장실이 대부분인 게스트하우스 중에서 우리가 원하는 숙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출장을 단 이틀 남겨놓고 초조해하던 중, 대구시 블로그에서 뜻밖의 정보를 발견했다. 


오 세상에, 무려 '고택 체험'이라니! 


시에서 관리하는 전통문화센터에서, 옛 고택을 숙박 용도로 개방한다는 것이다. 신나는 마음에 후기를 검색해 보니, 실제 투숙 후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직 홍보가 덜 되어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듯했다. 



잠이 오지 않는, 한옥에서의 하룻밤

곧장 대구 전통문화센터에 조심스레 전화를 걸었다. 가장 먼저 입 밖으로 걱정 어린 질문이 튀어나왔다. 


'저... 고택 숙박이 처음인데요. 아기가 있어서 그런데, 혹시 문은 잘 잠기나요?'.

'(아파트처럼) 대문에 번호 키 달려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주민 분들이 사시는 동네에요'

라며 너털웃음을 지으시는 담당자분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예약을 완료했다. 




그렇게 머물게 된 고택은 옛 구암서원이다. 대구 시의 전통문화센터에서 관리하는 문화유산 중 하나로, 달성 서씨 가문의 문중서원으로 쓰였던 고택이다. 조선 말기에 허물어졌다 1920년대에 다시 세워지고, 그 건물을 1996년에 지금의 자리에 복원한 것이다. 옛 문화유산을 인터넷으로 예약해서 숙박을 하다니,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계산성당 앞 구불구불한 골목을 돌고 또 돌고, 한참을 헤매어 들어가니 드디어 커다란 나무 대문과 마주 섰다. 미리 담당자에게 안내받은 대로 문을 열자, 묵직한 나무 대문 너머로 아담한 안뜰이 펼쳐졌다. 정면에 보이는 본채 수강당 옆으로 띄엄띄엄 떨어진 작은 독채 중 한 곳이, 오늘 밤을 보내게 될 한별당이다.




작은 한옥이지만 조그마한 바깥 마루도 있고, 이중문 구조로 되어 있어 안쪽 문은 유리, 바깥문은 한옥 문이다. 뜨끈뜨끈한 온돌방에 들어와 한지 바른 벽장문을 열자, 두툼한 전통 이불 한 채가 고운 빛을 띠고 있다. 불현듯 어릴 적 외할머니네 시골집이 떠오른다. 오래전 사라지고 없는, 옛 시골집 말이다. 이제 막 태어나 유아기를 보내는 조카딸은, 한옥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이는 처음 와보는 한옥이 그저 신기한지 문지방을 쉴 새 없이 넘나드는 바람에, 바깥으로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애엄마는 노심초사다. 


사설 숙소가 아니라 시에서 관리하는 시설이다 보니, 저녁이 되면 직원들이 퇴근하고 안뜰은 금세 고요해진다. 너무나 신기한 건, 이곳 서원은 분명 도심 한 복판에 있는데도 유독 동떨어진 섬 같은 느낌이 든다. 시골에서나 경험했던 온전한 어둠과 고요함을, 이 도심 속 고택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늦은 저녁에 일정을 마치고 어두운 골목을 돌아 들어오는 길이, 아무래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24시간 환하게 반짝이는 대도심에서만 살아온 내게, 밤의 고요함이 주는 낯선 감정은 곧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여기, 담이 너무 낮지 않아?


잘 준비를 하는데 문득 동생이 걱정 섞인 소리를 건넨다. 요즘 지어진 대부분의 주거용 주택과 달리, 한옥의 담은 택도 없이 낮았다. 앞마당에 서 있으면, 저 너머로 언덕길을 걷는 행인들이 내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내게 집은 언제나 나를 보호해주는 안전한 성 같은 존재였는데, 한옥은 뭐랄까. 천정이 뻥 뚫린 집처럼 느껴졌다. 방음이 되지 않으니, 작은 고양이 울음소리에도 온 신경이 쏠려 잠이 오지 않는다. 이건 무슨 소리지? 밖에 대문은 잘 잠겼나? 이런 걱정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덧 새벽. 불안함에 곤두섰던 신경이 어느새 풀어지자, 깜박 잠이 들었다. 



툇마루 너머 안뜰이 바라다 보이는, 안온한 아침

새소리, 작게 들리는 바람 소리에 눈을 떴다. 이불을 개기 위해 문을 열자,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서늘한 아침 공기가 안뜰을 돌아 들어온다. 아직 파릇하게 피어나기 직전의 까슬까슬한 겨울 잔디 너머로, 너른 마당이 보인다. 방에 앉아 바깥을 바라볼 때 나지막하게 맞춰지는 눈높이는, 아파트에서 살고 빌딩에서 일하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안온한 우리네 풍경 그대로였다. 




아이는 아침 댓바람부터 신나게 문지방을 드나들고, 곧이어 안뜰과 마당을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담 너머로는 아름다운 성당 건물과 빽빽이 자리한 집이 바라다보인다. 높은 담에 익숙해져 살던 내게, 낮은 담 너머로 보이는 이웃집 풍경은 낯설지만 따스하다. 앞집, 옆집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옛 삶의 방식이 어렴풋이 전해져 온다. 


어젯밤 나를 둘러싼 두려움은 어느새 날아가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삶을 벗어나 땅에서 가까운 공간에서 나지막하게 살아가는 언젠가의 내 모습을 꿈꾸기 시작했다. 고택에서의 하룻밤이 내게 준, 뜻밖의 선물이다.  


*대구전통문화센터의 고택 소개 페이지는 여기.




Who is nonie?

천상 글쓰기보다 말하기가 좋은, 트래블+엔터테이너를 지향하는 여행강사. 기업과 공공기관, 직장인 아카데미에 여행영어 및 스마트 여행법 출강으로, 휴일도 없이 싸돌아 다닙니다. 호텔 컬럼니스트. 연간 60일 이상 세계 최고의 호텔을 여행하고, 개인과 기업의 여행을 컨설팅합니다.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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