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찾는 이유
일상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은 일은 굉장히 신비스럽다. 그 하루만큼은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어 ‘어른스러움’을 잊어버린다.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세계 속에서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욕망을 찾기 위해 과거로 떠나듯 나는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먹기로 다짐한다. 그 자리에 본래의 욕망으로 채워졌다. 애써 욕망을 감추기 위해 분투해 왔지만 시선을 끄는 한 사람을 향해 눈길을 돌리는 순간 그 노력의 의미는 상실케 된다. 이제 나는 스스로 자립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가 되었다. 타인과 의 관계를 통해서 욕망을 충족시키기도, 절제하기도, 추억을 공유하며 욕망을 나눌 수 있도록 관계를 요구한다. 어쩌면 타인의 존재 여부에 따라 내 존재에 의미가 더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빛을 마주하는 순간에 어둠이 공존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소우주의 어머니. 긴긴 시간 동안 잔잔하게 흘러가는 태초의 공간은 오로지 어둠으로만 가득하다. 연약한 존재는 빛을 마주하기 위해 그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인내와 고통의 시간이다. 탄생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연약한 존재에게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되지 않는다.
어둠을 뚫고 빛을 향해 나온 연약한 존재는 곧바로 울음을 터트린다.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여인은 그저 원망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덧없고 무의미한 세계에서 불안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했다. 운명에 대항하지만 그것은 실패의 경험으로 끝난다. 놀라운 것은 삶의 의미가 여기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욕망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거기에는 고통과 아픔, 고독과 외로움이 내재되어 있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태고의 공간이면 소란스럽고 복잡한 세상은 덧없는 세계 속 공간이다. 우리는 이러한 한계적 상황에서 나름의 삶의 가치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가치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대치될 수 있다. 사랑은 양면성을 품고 있는 욕망으로 작동된다. 사랑을 수동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에 미안함이 크지만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성을 지적해야만 한다.
만남과 이별.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 만개와 미개.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은 필연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을 찾는 나. 이별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는 나. 지나간 세월을 회상하며 새로운 삶을 찾는 나라는 존재는 살기 위해 여전히 분투하며 애쓰고 있다. 이것이 내가 사랑을 찾는 이유다.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타인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만큼 사랑에 가까이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타인을 사랑하는 일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거대한 운명 앞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 사랑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했다. 원망의 대상으로 시작되었던 어머니는 이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실과 갈등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누구는 이것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회피하기도, 도망치기도, 망각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욕망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발견된 사랑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가치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