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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선씨 Sep 14. 2020

17년차 워킹맘, 처음으로 이직을 시도합니다.

진급에 누락하거나 고과 안 좋거나 아이들 케어에 부족함을 발견하는 날, 심적으로 힘들어하곤 한다. 즐거운 일이 있거나 회사일에 보람을 느낀 날, 이만하면 괜찮은 삶이라며 우쭐해한다. 가만 보면, 워킹맘으로 사는 12년 내내, 늘 마음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출렁인 것 같다.


바이오리듬이 바닥을 뚫고 내려가던 날이었다. 회사의 박한 평가에 소위 '빡친' 나는, 억하심정을 어떻게 풀까 고민하다 몇 개의 이직 사이트에 가입했다. 며칠이 지난 후엔 까맣게 잊다가, 다시 기분이 다운되던 날에, 이직 사이트의 프로필을 업데이트했다. 그렇게 조물조물 칸을 채워놓고 나니, 종종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이력서가 준비되지 않아서, 근무지 등 조건이 영 맞지 않아서 다 고사했지만  다.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 건  수가 없다.


심심산중에서 일주일 동안 여름휴가를 보내던 날이었다. 헤드헌터에게 연락이 왔는데, 성의없는 쪽지가 아닌 전화 정중히 의사를 물어주는 게 좋았고 회사도 근무지도 나쁘지 않아서 좀 솔깃한다. 그런데 너무 일정을 재촉한다. 헤드헌터에게 지금 휴가 중이고 써놓은 이력서가 없어서 다음 주에나 가능한데 괜찮겠냐 되물으니 조율하고 알려주겠단다. 그렇게, 이력서를 내야 할 날짜가 잡혔다.


휴가 복귀 후, 쌓여있는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이력서도 써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 역시 사람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나보다.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이틀만에 이력서의 항목을 대략 채우고, 지인의 조언도 받아가며 수정까지 마무리했다. 헤드헌터에게 이력서를 보내자마자 바로 면접 날짜를 잡잔다. 이래저래 바쁘니 다음 주 정도에 하자고 이야기했는데, 채용하는 회사가 일정이 급한 건지 금주로 일정을 당기되 면접을 화상으로 하자고 한다. 안그래도 면접용 옷을 사야 하나 머리는 어떻게 하지 화장도 잘 할 줄도 모르는데 등등이 걱정이었는데, 화상 면접은 부담이 덜어지니 좋다. 오케이!


화상으로 하는 거라지만 면접 날이 다가오니, 두근두근한다. 면접이란 걸 본 게 15년도 더 전인데... 이력서 기반으로 업무 내용을 정리하며 나름대로 면접 준비에 매진하고 있자니, 둘째가 와서 슬그머니 쪽지를 하나 준다.

녀석, 본인 일도 꼼꼼하게 못하면서, 챙김 받아야 할 녀석이 엄마를 챙겨준다.


화상면접은 1:1면접이어서 부담이 덜했고, 생각보다 빨리, 호의적인 분위기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실무면접 통과했으니 임원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오오? 이렇게 본격적으로 이직의 길에 접어드는 건가?


살짝 어리둥절한 상태로 면접용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소위 유명한 유튜버의 면접 Tip도 찾아보고, 면접 때 꼭 나오는 질문 목록 뽑아서 답변을 준비해보고, 헤드헌팅 일을 해봤다는 친척의 조언도 받아 본다.


제대로 준비하려고 하니 신경에 날이 선다. 준비할  많은데, 회사에선 할 수가 없으니 퇴근 후에 해야 하는데, 아이들 덕에 도무지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는 못하겠다 싶어서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한다. 면접 팁을 찾아 헤매는 것은 멈추고, 모아놨던 자료들만 틈틈이 복기한다. 하루하루 열정을 불태우고 있자니, 면접 날이 다다음주가 아닌 다음 주인 게 고마울 지경이다. 이거 원, 면접이 아무리 떨린다지만 준비하는 과정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하염없이 준비하느니 빨리 면접 봐버리는 게 낫겠다.


대망의 면접 날, 이번에는 휴가를 내고 나름대로 단정하게 차려입고 지하철을 타고 나선다. 늦을까 봐 서둘렀더니 면접까지 한 시간도 넘게 남았다. 면접까지 남은 마지막 한 시간이다. 끼적여온 노트들을 보고 또 보며 마음의 준비를 한다. 물 한잔 들이켜고 들어간 면접장. 면접관 세 분이 편하게 대해주셔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왔다. 면접관들의 마지막 질문이 "퇴사 처리하고 우리 회사에 오게 되면 정리하는데 얼마나 걸릴까요?"인 것으로 보아, 면접도 나쁘지 않게 본 것 같다. 무엇보다, 안달복달하며 준비하던 이벤트가 마무리되었다는 것 자체로 마음이 편안다.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끝난 것만으로 충분히 기쁘다. 어쩐지 결과는 어떻게 되든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다.




연락을 준다던 그 회사에서는 몇 주간 연락이 없다. 코로나 시국이라 인사팀도 정신이 없으려나. 나도 나름대로 회사에서 바쁘다 보니 궁금하긴 하나 그렇게 조급하진 않다. 이직은 현역일 때 해야 된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는다. 퇴사 후에 이직을 알아보면 연락 올 때까지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기분일 것 아닌가.

한 주에 한 번 정도는 헤드헌터가 연락을 해주긴 했다. 의사결정자가 포지션을 놓고 고민 중이라고 한다. 뽑으려면 뽑고, 안 뽑으려면 탈락이라고 알려주면 될 텐데 검토한다는 말을 계속 들으니 이게 긍정적인 건지, 부정적인 신호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전, 드디어 연락이 왔다. 면접 봤던 업무가 아닌 다른 포지션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이 포지션으로 면접을 다시 볼 의사가 있는지 묻는다. 음? 합격도 아니고 탈락도 아니고 다른 포지션? 탈락을 다르게 표현한 건가? 상대방의 진의는 알 수 없지만, 이직을 한다면 애초에 지원했던 포지션으로 이직을 해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이력서 등 자료를 만들면서 깨달은 건데, 나는 내가 하는 이 업무를 좋아하고 이것에 최적화되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포지션 관련해서는 업무 관련 경험이 없어 면접을 본다 해도 어필할 것이 없고, 귀사에서도 경력자를 찾는 것일 텐데 나는 이 분야에 있어 신입과 다름이 없으니 지원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한여름밤의 꿈에서 깨어났다.


최종 합격은 아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이력서를 쓰면서 내 커리어에 대한 스토리라인을 정리할 수 있었고,

언젠가 올 다음 이직 기회에서 사용할 '이력서', '면접 PT'를 정비할 수 있었고,

정말 오랜만에 '면접'을 보는 경험도 해봤다.

무엇보다, '난 쓸모 있는 사람이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내 이력을 찾는 곳도 있고, 면접을 보자고 하는 곳도 있다. 지금 회사에서는 진급도 안 시켜주고 고과도 엉망인데, 다른 회사를 가기엔 나이도 많고 집을 옮기기도 힘들고 여기만 한 곳이 없으니 그저 감사하게 다녀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이 회사가 아니면 나를 받아줄 데가 없을 테니 어쩔 수 없이 붙어있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세상은 넓고 회사는 많고 이직 기회는 있다는 걸 깨달았달까. 무엇보다 나도 회사를 선택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자존감이 떨어지는 날엔, 또다시 이직의 꿈을 꾸어야겠다. 한여름 밤의 꿈.

꿈을 이뤄도 좋고, 꿈에서 깨어버려도 좋다. 꿈을 꾸는 동안 자존감 게이지는 다시 채워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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