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t of Infidelity
렌의 서재, 늦가을 밤.
방 안에는 오래된 책과 나무 냄새, 그리고 낮게 깔린 재즈가 흐른다. 렌, 지윤, 애쉬 셋은 그의 기일에 맞춰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창 밖에는 바람이 불고, 책장 위에는 세월의 먼지가 내려앉아 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숨겨진 슬픔이 얇게 깔려 있다.
렌은 아무 말 없이 사진 앞에 선다.
흑백 속, 아직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의 얼굴들이 웃고 있다. 렌은 사진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시선을 그 옆으로 비켜둔다. 프레임 가장자리에 묻은 먼지를 털어낼 듯, 손끝을 댔다가 그대로 내려둔다. 슬픔을 끌어안기보다, 조금 밀어두는 쪽을 선택한 사람의 자세로..
지윤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숨을 쉰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는데도, 무언가를 오래 붙잡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다.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다, 한참을 멈춰 서 있던 악보 쪽으로 시선을 준다. 가사도 없이 떠오르는 선율 하나가 마음속에서 맴돌지만, 끝까지 흘러나오진 않는다. 애도란, 끝내 완주하지 못한 노래 같다고 느끼며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애쉬는 창가에 서서 정원을 바라본다.
연못 위에 떨어진 낙엽 하나가 파문을 만든다. 그 움직임은 아주 작고, 소리도 없지만 애쉬는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뜬다. 그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떠오른 듯, 입술이 아주 조금 움직인다. 그러나 말은 새어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기억보다 침묵이 어울리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며, 애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선다.
방 안은 고요하지만, 비어 있지 않다.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말보다 느린 애도의 움직임 속에 머문다. 지금 이 시간은 어떤 해답도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한 사람의 부재가 만들어낸 깊고도 조용한 온도를 받아들이는 중이다.
"우리 때문일까..?"
지윤이 먼저 침묵을 깬다.
애쉬는 벽에 겹쳐진 그림자 너머로 두 사람의 얼굴을 하나씩 바라본다.
"아마 셰인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배려해서 우리가 죄책감 가지는 것마저 원하지 않았을거야."
방 안의 공기가 아주 조금 기울었다.
누구도 그 감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셋 모두 알고 있었다. 말해지지 않은 마음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꺠어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은 오래된 냄새처럼 스며들고, 그날로부터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지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아직 이 방에 남아 있었다.
그 누구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무언가를 숨기기보다, 서로의 균열을 조용히 바라보는 방식이 되었다.
어떤 고백도, 어떤 확신도 없이,
그저 서로가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정은 아주 작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밤,
셋은 말 대신 각자의 마음 어딘가에
처음으로, 다시 시작될 이야기의 문을 조용히 열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