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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원 Nov 18. 2018

<김사원 표류기>

#3. 빨간 맛

누구를 위한 회식인가

그 누구도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식은 어김없이 잡혔고 높은 분들, 그들만의 Fiesta가 열린다.

회식의 꽃은 술이라 하지만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체질적으로 술이 몸에 잘 안 받는데, 한잔만 마셔도 온몸에서 반응을 한다.

코 안이 부어서 코 맹맹이가 되고, 얼굴은 물론 온몸이 울긋불긋 붉게 변하는데 이런 내 모습을 본 친형은 소고기 마블링 같다고 말했다. 

어쨌든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고로 회식도 좋아하지 않는다.


지난 회식도 어김없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의지가 생기고 자시고의 문제는 사실 중요치 않았고 일방적으로 회식 통보를 받았다. 새로 전보를 받은 직원들을 위한 환송 회식으로, 전 부서원이 필히 참여해야 하는 중요한 본부 회식이라고 하셨다.

신기하게도 회식이 있는 날이면 언제나 그렇듯 업무는 정각 6시에 칼 같이 종료가 된다. 이건 모든 회사의 불문율이지 않을까 싶다.


회식은 모든 과정이 힘들다.

그중에서도 타이밍을 잡는 게 무척이나 어려운 데, 회식장소에 너무 일찍 도착하여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늦게 가서도 안된다. 모든 부서원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식장소로 이동을 한다. 

회식장소에 본부장님이 입장하셨다. 그리고 가장 상석 자리에 앉으셨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티 나지 않게 본부장님의 시야로부터 가장 먼 자리이자 안전지대를 찾아 앉아야 하는 고도의 눈치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명당자리를 발견하고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나를 콕 집어 본부장님 앞자리에 앉으라는 과장님의 말을 듣자마자 명당자리에 앉아 평온한 회식을 즐기려 했던 모든 계획이 물거품 되어버렸다.

그렇게 나는 본부장님이 앉으신 맞은편 자리에 앉게 되었다.


본부장님은 엄청난 애주가신데다가 소주는 무조건 참이슬 빨간 맛만 드신다.

술은 취하려고 마신다는 그분의 술자리 철학에 따라 우리 자리의 소주는 참이슬 빨간 맛으로 세팅되었다.

본부장님께서 하사하시는 참이슬 빨간 맛은 나의 오장육부가 여전히 제자리에 있음을 확인해주는 그런 맛이었다. 그렇게 나는 바짝 긴장한 채 본부장님 앞자리에 앉아 시중 아닌 시중을 들게 되었다.

'나는 왜 하필 본부장님 앞자리에 앉아서 참이슬 빨간 맛을 주시는 대로 마시고 있는 걸까?'

'왜 하필 정신이 혼미한 이 와중에도 뜨거운 불판 앞에서 삼겹살을 굽고 있는 것일까?'

만감이 교차하였다.


싸늘하다, 위장에 소주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본부장한테 밑에서 한 잔, 과장한테 밑에서 한 잔, 나한테 한 잔, 다시 본부장한테 밑에서 한 잔, 과장한테 밑에서 한잔...!          


손모가지를 걸고 아귀에 맞서 싸우는 고니의 심정이 이런 것인가?

하지만 나는 타짜가 될 수 없다. 아니 호구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판은 내가 설계한 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내 나는 타짜에게 영혼까지 털려버린 호구처럼 나는 소주에 녹아웃이 되어버리고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 왼쪽으로 꺾자마자 화장실이 보인다. 문을 열고는 변기가 있는 사로에 들어가 먹은 것들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사실 나는 회식 때 먹는 음식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비싸고 좋은 음식을 먹어도, 술 먹으면 다 토할 걸 알기 때문에 메뉴는 내게 중요하지가 않다.

싸도 좋으니, 술만 적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밖에 없다.


토를 했더니 조금 속이 편안해졌다.

다시 좁은 계단을 올라 내가 앉았던 자리로 갔다. 다행히도 자리배치는 자연스럽게 많이 바뀌어 있었다.

토를 했더니 배가 너무 고팠다. 우리 홀을 담당하시는 이모님께 나는 된장찌개와 공깃밥을 시켰다

회식의 분위기는 내 얼굴색처럼 점점 더 달아올랐고 자리이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팀장님부터 주임님까지 빈번하게 자리를 옮겨가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테이블에 혼자 된장찌개만을 기다리는 나를 모 계장님께서는 못 본 척 지나갈 리 없으셨는지 사람들이 많은 자리로 나를 부르셨다.

이제 좀 편안히 앉아서 된장찌개에 밥 말아먹나 하는 나의 기대감은 그렇게  무너져버렸다.

'이모! 된장찌개 시킨 지가 언젠데 아직도 왜 안 주시는 거죠?'

우리 테이블로 소주를 가져다주시는 이모가 원망스럽다.

그런 내 모습이 측은한지 부서에 새로 온 후배님들이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괜찮다. 

부끄러움보다 이런 술자리가 더 곤욕스럽고, 초기화된 내 위장이 더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맥주 몇 잔을 마시고 다시 소주를 마시려던 찰나에 드디어 된장찌개와 공깃밥이 나왔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뜰 수 있었고, 그제야 된장찌개와 밥 한 숟갈을 뜰 수 있었다.


1차 회식이 이렇게 끝이 났다. 고깃집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음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걱정의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본다. 

다행스럽게도 2차는 원하는 인원만 참여하는 소규모 모임으로 결정이 된 것 같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려 전철에 몸을 실었다. 


문득 레드벨벳의 빨간 맛 노래가 떠오른다.

빨간 맛 궁금해 Honey 깨물면 점점 녹아든 스트로베리 그 맛

아직 레드벨벳은 참이슬의 빨간 맛을 보지 못한 것 같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빨간 맛이 존재한다.

봉급쟁이에게 스트로베리 같은 빨간 맛은 오로지 빨간 공휴일의 맛 말고는 없다.


다시 되묻고 싶다

누구를 위한 회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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