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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원 Nov 03. 2018

<김사원 표류기>

#1. 매너리즘

매너리즘에 대해 논하기 전에, 내 이름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이름에 돌림자를 사용하는 데, 내 항렬의 돌림자가 '섭'이며, 한자로는 '燮'(불꽃 섭)을 사용한다.

한자 '燮(불꽃 섭)' 자의 구성을 보면 알겠지만 양옆으로 火(불 화)가 있는데, 내가 남들보다 화를 많이 가지고 사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종종 이런 화는 감정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화마가 이성적인 부분까지 옮겨져 나의 판단력을 다 태워버리리는데 이는 내가 그릇된 행동을 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다니다 보면 빈번하게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나도 매너리즘에 빠지는 데 그 빈도가 빈번하고 강도가 꽤 센 편이다. 남들은 3년, 6년, 9년 단위로 매너리즘이 온다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내게는 일정한 주기도 없이 찾아와 상실감과 무력감을 주곤 한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똥고집이 첫째 일 것이고, 둘째는 그런 똥고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위해 원치 않는 노동을 하다 보니 내 속에 화가 많이 생겨 정신을 구성하는 이성적인 부분과 감정적인 부분이 다 타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들어 다시 나의 화는 쉽사리 소화되지 않고 거대한 화마가 되어 나를 매너리즘에 빠지게 만들었다.

현재 내가 소속된 부서로 발령을 받은 것은 지난 3월 초순의 일이었다.

우리 회사는 타 회사와 달리 인사발령을 낼 때 일정한 규칙이 없으며, 오너의 의사가 많이 반영된 채로 갑작스럽게 발령을 낸다. 물론 내가 받은 인사발령은 정기인사에 해당되기는 하나, 모든 직원들이 의아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인사발령이었다. 

부서 간의 애로사항을 이해하고 원활한 업무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취지와 이를 통해 다양한 업무능력을 배양시켜 T자형 인재를 추구하겠다는 오너의 거룩한 그 뜻은 이해하나, 나 같은 소인배가 그 뜻을 몸소 이해하고 실천하기에는 내 그릇이 간장종지와 같아 넘칠 때가 많다.

어찌 됐든 그렇게 나는 전보 발령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내가 받은 업무는 단순한 일들의 무한 반복, 개미지옥과 같은 노동의 현장이었다. 

우리 팀은 다른 부서의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조직된 팀으로, 지원(support)의 성격이 강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몸에 화가 많은 일반적인 경상도 사람으로서, 일이 쌓이는 것을 천하태평 보지 못하는 불한당 같은 성격의 소유자다. 

때문에 일하는 스타일이 닥치는 대로 다 처리해야 내 직성이 풀리는데, 우리 업무는 마치 디펜스 게임과 같아서 매시간마다 업무라는 강력한 적들이 나의 칼퇴근이라는 방어탑을 뚫기 위해 쳐들어 온다.

나는 이러한 적들을 처리하기 위해 내가 관리하는 모든 재원(시간직 직원들을 포함하여)과 업무 노하우를 동원하여 그들을 처리함으로써 칼퇴라는 대의를 얻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이내, 무차별적인 업무량에 의해 나와 나의 병사들은 전의를 잃고 피로가 누적이 되어, 더 이상의 업무량을 처리할 수 없게 된다. 

칼퇴라는 방어탑이 무너지고, 결국 우리는 야근이라는 패배를 얻게 된다.


우리를 공격해오던 적들은 6시를 기점으로 공격태세를 멈췄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업무는 야근이라는 강력한 조치를 통해 처리가 되는데, 나는 이때마다 개선 사항들은 조금씩 생각해두고, 혼자 여러 가지 상황들을 시뮬레이팅 한다.

하지만 이내 나의 생산적인 두뇌활동은 회의감에 잠식되곤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관리자님이다.


여기부터는 내 입장만을 말하겠다.

내가 맡고 있는 업무의 종류가 타 직원들보다 많은 상황이었으며,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업무에 적응하는 데 있어 애로사항이 많았다. 

나는 관리자와 대화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애로사항들을 언급했는데, 단순히 불만을 어필하기보다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선의 개선책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나의 애로사항들이 어느 정도 개선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내 관리자로부터 돌아오는 피드백은 상급자와의 대화방식에 대한 지적과 불만이 많은 사람이라는 평가였다. 때로는 관리자로서 자기도 똑같이 힘들다는 하소연도 함께 하시곤 했다.

어찌 됐든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하고 나면 나는 이런 생각에 빠진다. 

'관리자란 무엇이고, 관리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냥 6시 퇴근 시간만을 바라보면서 업무 환경의 청결만을 강요하고, 시스템적인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태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들이 다니는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관리자로 진급을 할 때 시험을 보거나 교육을 진행하여 관리자에 소양과 덕목을 쌓게 하는데 반해 우리 회사는 관리자 교육에 이리도 소홀한 채 저리도 방치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정녕 이 회사는 저런 관리자를 방치한 채, 어찌 성장을 논할 수 있는 것인가?'


속으로 화를 삭이려고 해도, 이미 나의 화는 거대한 화마가 되어 나를 삼켜 버렸다. 화마에 삼켜진 나는 판단력이 상실돼버렸고, 그 자리는 회의감과 매너리즘이 자리 잡고 말았다.

'나는 정녕 회사에 어울리는 인간이 아닌 것인가?' 

조직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겉도는 부적응자가 된 것만 같아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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