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 Nov 25. 2024

그림자를 걷는 사람들

또 다른 시작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그림자가 숨어 있다. 다른 사람을 향해 쓰고 있는 가면 뒤에, 우리가 내보이는 얼굴 아래 우리 인격의 숨어 있는 부분이 살고 있다. 우리가 잠에 빠져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밤에 우리는 그림자를 대면한다." <융학파의 꿈해석> 中


세상에 그림자 없는 완벽한 인간이 존재할까?

누구에게나 그림자는 존재한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

단점이라고만 생각하며 회피했던 달의 이면.

도망치는 삶을 살아왔던 나에게,

그림자를 마주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꿈모임 같이 할래?


 재작년이었을 거다. 상담 선생님께서 모임을 만들었다며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솔직히 내키지는 않았다. 꿈이라는 소재로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영화에서처럼 각자 할 얘기만 조잘대다 끝나는 모임인가 싶었다.

 재작년의 나는 만신창이였다. 참을 수 없는 우울감에 마지막 발악으로 상담을 받은 지 몇 달째 되던 때였다.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 두려웠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선뜻 웃으며 대답했다.


네. 좋아요.


 그렇게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낯선 항해에 첫 발을 내디뎠다.  


 모임 첫날, 총 네 명의 멤버로 소소하게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제일 막내다. 다른 분들은 모두 50대 중반쯤, 엄마 또래분들 이셨다.

 모임이 시작되면 모두가 반말을 써야 하기 때문에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꾸준히 존댓말을 쓰고 있다.)

 각자 닉네임을 정하고 왜 그렇게 정했는지 간단히 소개했다. 나는 딱히 기발한 닉네임이 떠오르지 않아서 '찰리'라고 지었다. 영화 <찰리의 초콜릿 공장>의 그 찰리다. 거대한 초콜릿 공장을 물려받고 싶다는 농담 반, 내면이 단단한 찰리처럼 되고 싶다는 희망사항 반.


 본격적으로 모임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식으로 진행될 건지 설명을 들었다. 꿈 이론 책을 함께 읽으며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 다음, 한 사람의 꿈을 투사하는 활동이었다. 단순히 앞으로의 미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밤에 수면을 취하며 꾸는 꿈을 이야기하는 거라니 의외였다.


 여기서 투사란, 심리 투영이라고도 불리는데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자기의 측면을 타인에게 투영시키는, 전가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자신이 겪어온 데이터를 기반으로 보게 된다. 누군가가 이유 없이 밉다면 자신의 그림자가 상대방에게 비쳐 보이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꿈투사를 하는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웠다. 미리 기록해 둔 꿈을 보며 상대에게 질문을 한다. 꿈 내용 자체에 대한 질문, 단어 연상 질문, 감정 질문 등이 있다.  더 깊이 들어간다면 꿈에서 보이는 패턴을 발견하고 현실에 대입시켜 질문해 볼 수도 있다.

 답변 내용을 토대로 상징과 자신의 의견을 덧대어 투사를 한다. 온전히 융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일 수 있으나, 이 모임을 하는 목적은 꿈이라는 소재를 통해 각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에 정석대로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최소한의 규칙은 꼭 지켜야 했다. 투사를 할 때는 '내 꿈이라면'이라고 시작해야 하며, 상대에게 감정을 강요하거나, 조언 혹은 평가하거나, 단어 연상에 너무 깊이 들어가는 질문은 자제해야 한다. 괜히 감정을 상하게 하고, 꿈 내용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나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었다. 방향이 완전히 튀어버린 투사가 나왔다. 진행자인 랄라는 오히려 신선하고 좋다며 위로해 주었다. 평소라면 왜 그렇게 했을까 자책하고 계속 되짚어 봤을 텐데 이 모임의 가장 큰 규칙 중의 하나, 모든 투사에는 답이 없다.라는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투사를 받는 사람은 사연과 거리가 멀다고 해서 지적할 수 없는 거다.


 꿈투사는 마치 고고학을 다루는 것만 같았다. 땅 속 깊이 묻혀있던 유물을 캐내 연구하며 역사를 더욱 견고히 다지기도, 잘 못 된 것은 바로잡기도 하는 작업. 우리가 묻어 두었던 것들이 하나씩 수면 위로 올라오면 수치심이 발동되지만 이 모임에서만큼은 색다른 시선으로 감정을 정돈시킬 수 있었다.

 내가 그래서 그랬구나. 그 사람이 그래서 그랬구나. 나는 지금 이런 상태구나. 알아차림의 순간이 얼마나 큰 성취인지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한다. 내 약점이 드러났다고 생각하며 숨기기에 급급하지 않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여전히 나도 그런 모습이 있다.


 모임에서 느낀 따뜻한 위로와 공명을 이루는 순간들, 간식을 나눠 먹으며 웃던 시간들은 마음속 벽 한편에 새싹을 돋게 했다. 각자의 아픔은 앞으로 가야 할 길에 양분이 되었고, 밟혀왔던 순간들은 더욱 단단한 기반으로 다져지며 지금의 우리로 있게 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 전일성을 향한 첫걸음. 그림자를 걸으며 걷어내는 고단한 작업의 첫 삽을 과감하게 퍼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