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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근 Jan 29. 2019

더 하는 게 쉬울까, 덜 하는 게 쉬울까?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한국과, 조금 늦은 감이 있는 새해 다짐 -1


캐나다에 돌아왔다.


한국에서 반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지만, 어제 본 캐나다를 오늘 또 보는 듯하다. 어딜 가나 들리는 영어와 후줄근한 차림으로 건들건들 걷는 행인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이곳의 시간은 예상보다 더 느리게 흐른 모양이다. 나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마음가짐으로 후드와 운동복 바지를 꺼내 입었다.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기차역 앞에 있는 '스마일 타이거'에 도착했다. '스마일 타이거'는 키치너에 널린 폐공장을 수리해 만든 카페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벽 사이사이로 울퉁불퉁한 벽돌이 보인다. 그 아래에는 매끈한 대리석 테이블과 커다란 커피 머신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스러져 가는 것과 새로운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어우러진 모습은 죽었던 장소를 되살린 것 같은 굉장한 생동감을 뿜어낸다. 이 묘한 조화가 좋다.


커피는 한국의 반값이다. 카운터 뒤에서 췩! 하고 경쾌한 스팀 소리가 났다. 바리스타의 현란한 손놀림과 눈길이 오래 머무는 커피와 달리, 티백을 꺼내 물에 퐁당 빠뜨리기만 하면 되는 차 한잔의 준비 과정은 간소하다 못해 무심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니 커피의 두배 가량 나가는 찻값에 사소한 불만이 일었다. 나는 오랜 시간과 품이 드는 찻잎의 공정 과정을 애써 떠올리며 농부의 보이지 않는 수고에 감사를 올렸다. 그러고는 커피와 불화 중인 내 위장을 다독이며 주문을 했다.


"음료가 준비될 때까지 앉아 계세요."

카페 종업원은 적당한 웃음기를 머금고 나와 눈을 맞추었다. 캐나다스러운 친절이었다. 한국에서 돌아온 나는 친절에도 계층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친절함이 이미 호의를 포함한 상태인데, 어떻게 거기서 더 친절할 수 있는 걸까? 스스로의 생각에 의문을 품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점원의 지시대로 창가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그리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점원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수백 번은 해 보았을 익숙한 움직임을 보며 7년 만에 방문한 한국을 생각했다.






나의 첫 문화 충격은 편의점에서 일어났다.

"카드를 주시겠어요?"

종업원은 내 손에 있던 카드를 받고 카운터 앞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내 앞에, 내 방향으로 나 있는 결재기에 카드를 꽂아 주었다. 위치적 거리적 불편함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반복해 온 익숙한 동작이었다. 이민 생활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황송한 취급을 받은 나는 일순 멍해졌다. 소비자가 소비를 하기 위하여 카드를 꼽거나, 갖다 대거나, 슬라이드를 하는 온갖 행위를, 망아지가 태어나면 걷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자연의 이치로 여겼는데...?


캐나다 종업원의 친절이 자본주의 정신에 입각해 손님의 재방문을 유도하는, 만족스러운 경험의 최소 요건을 갖춘 적당한 친절이었다면 한국에서 내가 느낀 친절은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친절이었다. 미소를 띠고 밝은 목소리로 손님을 맞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꾸밈의 정도는 달랐다. 한국 서비스직 근로자의 목소리는 캐나다 사람보다 한 톤 이상 높고, 문장은 높임말과 돌려 말하기 등의 이유로 아주 길어진다. 태도에 흠 잡히지 않으려 만전을 기하는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웬만하게 완벽하지 않고서는 소비자를 끌 수 없는 경쟁 사회라는 맥락이 떠올랐다. 고객을 잡기 위한 기업의 몸부림이 먼저인지, 높아진 손님의 요구에 책 잡히지 않으려는 노력이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한국은 무엇이든 적정 수준 이상을 당연하게 추구하는 사회다. 어른이 되어 처음 온 한국의 인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과잉'이었다.


마트 입구에서는 정장 입은 사람들이 나를 vip 고객 맞이하듯 인사했다. 식품 코너에는 매 통로마다 시식 코너가 있고, 담당 판매원이 이렇게 신선한 버섯이나 고등어나 채소 따위를 만나보실 수 있는 기회는 오늘뿐이시라는 귀한 정보를 귀띔해준다. (캐나다 일반 마트에는 시식코너가 없다. 아아주 가끔 있더라도 그릇 하나만 덜렁 있다.) 지하철 출구에서 나오면 누가 뭐랄 것 없이 제 발로 달려드는 전단지 뷔페를 즐길 수 있다. (전단지? 메일함에 가끔 몇 개 들어있는 그거 말인가요?) 한강변에서 주문한 치킨이 제 주인을 찾아가는 과정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치킨이 배달이 된다고요?? 배송비랑 팁 주려면 엄청 비싸겠다!) 북적이는 퇴근길에 계좌 이체로 소떡소떡과 얼큰한 어묵 국물로 요기할 때, 속으로 한국 최고! 를 외쳤다. (음식은 레스토랑 아니면 집에서 먹는 거라고 배웠어요.) 고속 터미널 역에 가면 만원의 행복이 얼마나 큰 범위를 호가하는지 몸소 체험할 수 있다. (요즘엔 구제 샵에서도 10불로 살 수 있는 게 없어요.) 캐나다에 살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풍족함이었다. 초반에 느낀 낯섦은 잠시, 갖가지 선택이 끝없이 펼쳐진 한국에서 나는 자유를 느꼈다.


한국에 온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잠시 요기를 하러 들른 편의점에서 다시 한번 불편한 상황과 맞닥뜨렸다.

"카드는 입력기에 끼워주시면 됩니다."

나를 힐끔 쳐다본 점원이 물건을 봉지에 담으며 말했다. 당연하게 그에게 향하던 내 카드는 잠시 갈 길을 잃었다. 

'뭐야... 왜 안 해줘. 여기 불친절하네.'

한국의 온도에 익숙해지던 무렵, 나는 굽시니스트의 경계에 가 있지 않은 친절을 친절로 취급하지 않게 되었다.






과연 내가 경험한 것은 자유였을까. 세차 후 물휴지를 받지 않으면 기분이 찝찝하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한 물건이 하루 이틀 안에 오지 않으면 판매처 담당자와, 쇼핑몰 시스템과, 포장 아르바이트와, 물류 관리사와, 택배 회사와, 담당 택배 기사님 등 온 세상이 원망스럽다. 화장품을 구매할 때 증정품이 따라오지 않으면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응당 제 것이어야 할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화를 터뜨릴 것이라는 걸 나는 안다. 만족을 부르고, 삶의 질을 높이는 자원이 넘치다 보니 상대적인 박탈감도 그만큼 컸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언제나 바빴다.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한 많은 일을 처리해야 했고, 완벽에 플러스알파를 더하려면 거기에 더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기 때문이다. 캐나다 사람들의 일 처리는 느리다. 아주 많이. 어느 정도이냐 하면, 엄마가 일하시던 샌드위치 가게에 점심 줄이 문밖까지 이어져도 캐나다 종업원은 앞에 선 손님의 두 번째 아들의 안부를 묻고 있고, 뒤에 선 사람들은 아들 조나단은 잘 크고 있는데, 어머니가 최근 계단에서 미끄러지셔서 병원에 입원 해 있다는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경청한다.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우리 엄마만 있을 뿐이었다.


다른 예로,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에는 매년 튤립 축제가 열린다. 세계 2차 대전 시기, 나치 치하를 피해 네덜란드의 차기 여왕 줄리아나는 캐나다에 잠시 몸을 의탁한다. 후에 네덜란드에서 고마움의 표시로 튤립 구근 십만 개를 선물로 주었다는 미담이 이 나라 명물 튤립 축제의 유래다. 매해 65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불러오는 이 행사에 원샷원킬을 날리는 종족은 한국인이 유일할 것이다. 

"뭐야, 에버랜드 튤립 축제가 낫다."

이 외에도 건국 150 주년 불꽃놀이에 150 숫자 모양 불꽃 정도는 터뜨려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실망하는 친구 옆에, 불꽃이 한 발 한 발 터질 때마다 탄성을 터뜨리는 캐나다인 무리가 있었단다. 이렇듯 이곳 사람들은 '하자'가 많은 서비스에 익숙하지만 대부분 5시에는 집으로 향한다. 새벽 한 시에도 마음이 동하면 족발을 시켜 먹을 수 있는 어메이징 하지만 그만큼 일이 많은 나라와, 저녁 여덟 시 이후에는 다들 집에서 쉬느라 나가봤자 할 일이 없는 나라 중 어떤 게 더 나은 걸까?






나는 모르겠다. 사회 구조를 열띠게 비판하다가도, 내일이면 또 출근해야 하는 현실에 결국 입을 다물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 한국에서 그러했고, 캐나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회 구조에 대한 담론에서 오는 문제의식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회 초년생인 내가 일상을 더듬다 툭 불거진 질문을 느끼는 때는, 한참 노트북을 보다가 이제는 쉬어야지, 하고 스마트폰을 켜는 내 두 눈알을 향한 연민에서 온다.


나는 왜 쉬는 일도 스마트폰 없이는 하지 못할까? 예전에는 어땠지? 짬짬이 나는 시간을 스마트폰에 소비하는 게 과연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방법일까? 나는 작은 틈을 채우는 데 집중해서 큰 흐름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없어졌구나. 쉴 때는 항상 동영상이나 음악을 켜 놓는다. 창 밖을 보거나, 새소리를 듣거나, 빛줄기 사이사이로 느리게 흐르는 먼지 떼를 마지막으로 구경한 게 언제더라? 한국만 과잉인 게 아니라 캐나다도 마찬가지잖아. 시간을 쓸 선택지가 너무 많다. 수요보다 공급이 넘치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그 넘치는 자원의 항시 조달이 가능해졌다. 예전에는 못해서 안 했던 게, 이제는 안 해서 안 하는 게 됐다. 자원은 무한에 가까워졌지만, 사람은 여전히 유한하다. 언제부터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경계가 모호해진 걸까? 그 간극 사이에 불안감과 죄책감이 똬리를 틀 수도 있겠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내 눈알 구제 프로젝트는 장기적인 삶의 방향을 조정하는 어떤 움직임으로 확장한다. 사회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지만 내 일상을 지지고 볶을 수는 있다. 나는 요즈음 이런 소시민적인 접근을 익히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인생에서 크고 작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나만의 방법이고, 신세 한탄을 따라오는 무력감을 막을 (약간은 변명 같은) 방어구다. 한국에서 이렇게 저렇게 모은 생각들을 가지고 요리할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한동안 빠른 한국 흐름에 익숙해진 몸과 정신이 캐나다의 흐름에 막 들어와 두 나라의 차이를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이때, 새해를 어떤 속도로 보낼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 새해 다짐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글, 그림 상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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