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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Sep 14. 2020

층간소음, 일 년 후

...아마 다시는 아파트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정확히 말하면 삼 년 반을 살았다. 그 지긋지긋하고도 지겹게도 정든 집을 벗어나기까지 나에게는 삼 년 반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집에 들어가게 된 건 코딱지만 한 기존 집의 평수 때문이었다. 세 쌍둥이를 출산하고 우리 여섯 식구의 몸을 뉘이기에 작은 방 두 개에 변변찮은 거실조차 없었던 13평의 작은 빌라는 충분치 않았다. 미국에서 남편이 꾸역꾸역 가져온 세 개의 아기 침대를 설치하고 나니 13평의 작은 집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무질서하게 변했다. 매미가 한창 울었던 한여름이었다. 급하게 얻은 스물네 평의 오래된 아파트가, 에어컨조차 설치되지 않아 푹푹 쪘던 그 아파트가, 내게는 파라다이스처럼 느껴졌다. 남편과 나의 방, 큰애의 공부방, 세 쌍둥이의 침대 방, 온갖 아기자기한 장난감으로 채워진 널찍한 거실, 작지만 아늑했던 주방. 스물네 평의 아파트는 여러 가지 필요와 권리로 세분화되었다.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집다운 집이었다. 그 평범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오십일이 갓 지난 신생아 세 명을 안고 집으로 들어섰다. 먹이고, 놀리고, 재우고. 이른바 먹놀잠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의 패턴을 따라 나의 하루도 흘러갔다. 매일 아이들의 수유량, 소/대변, 수면 시각을 기록했고 아이들이 잠들면 나도 아이들 옆에 모로 누워 쪽잠을 잤다. 잠은 늘 부족했고 두 눈은 항상 충혈되어 있었다. 매일 밤 아기들의 수유를 규칙적으로 해야 했기에 9~10번 이상 일어나야만 했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니 예민하게 변했다. 가시같이 울어대는 아이들의 울음에 하루하루 견디기 힘들었고 엄마라는 이유로 나의 모든 꿈과 인생을 포기하고 집에 틀어박혀 모든 책임을 다해야만 한다는 것이 분하기도 했다. 아들 넷 엄마라는 자리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가끔씩 숨이 턱턱 차오를 때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삶은 늘 고되고 아팠다.     




109호의 남자. 아마도 그와 나는 악연이었던 것 같다. 그가 우리 집에 올라왔던 그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일치감치 세 쌍둥이를 낮잠 재우고 큰애와 점심을 먹었다. 엄마와 놀고 싶다는 큰애를 위해 거실에서 잠시 아이와 놀아주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그 소리에 잠든 아기들이 화들짝 잠에서 깨어 앙앙 울어댔다. 덩달아 나의 마음도 날카로워졌다.


“방금 뛰었죠? 시끄러워서요.”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은 서늘했고 그 안에는 화가 담겨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쳤다.


“제가 교대근무를 해야 해서 낮에 잠을 자야 하거든요. 조용히 좀 해주세요.”


우리 집으로 인해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누군가에 사과를 하는 것은 어쩌면 정상적인 수순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화가 솟아올랐다. 그의 눈빛, 태도, 자기 위주로 된 설명들이 화가 났다. 교대근무를 해서 낮에 잠을 자야 한다는 것은 개인의 특수한 사정이 아닌가. 그의 모든 상황에 맞춰 살얼음을 걷듯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아직 아기들이 어려 기어 다니지도 못하거든요. 뛰었다면 큰애였을 텐데 저와 함께 있었는데 방금 분명히 뛰지 않았어요. 아마도 다른 집인 것 같아요. 여기는 오래된 아파트라 윗집, 옆집 소음도 다 들리거든요.”


나도 모르게 여러 말들이 튀어나왔다. 그냥 미안하다며 더 주의하겠다고 했어야 했나 후회가 되던 찰나였다.


“녹음한 거 가지고 올까요?”


말문이 턱 막혔다. 이 한 마디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도 두 아들을 키우고 있는 가장이었다. 맞벌이 었던 그의 집에 아이들만 남겨진 날이면 온 집안이 떠나가도록 시끄러운 소음이 흘러나왔다. 어떤 날은 친구들을 초대한 것인지 아이들의 뛰는 소리와 괴성이 난잡하게 섞여 들리기도 했다.


“그 녹음이 우리 집 소음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지금 아이들이 깨서 더 이상은 이야기 못할 것 같은데요. 이만 가보세요.”


현관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침을 꼴깍 삼켰다. 문이 닫히기까지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 보던 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이후로 그는 나에 대한 분노를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세밀하게 표출했다. 층간소음 보복 스피커를 천장에 달아 드르륵드르륵 마치 강한 드릴이 작동되는 것 같은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었고 그럴 때면 바닥이 울릴 만큼의 강력한 진동이 느껴졌다. 또한, 시간을 가리지 않고 고무망치로 천장을 두들겼다. 아침 여섯 시, 새벽 한 시, 오후 세시. 무거운 적막 속에서 울려 퍼지던 고무망치 소리는 우리의 소음에 주의를 주기 위한 경고라기보다는 무언가에 분노가 느껴질 때마다 그것을 표출하기 위해 행하는 습관적인 행위 같았다. 고요한 밤에 들려오는 고무망치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 인간의 몸속에 전율하는 살기를 느꼈다. 남편이 없는 밤에 들려오는 그 소리는 내게 공포 그 자체였다.     




“뛰지 마! 다 자리에 앉아! 빨리!”

아이들이 기고, 걷고, 뛰게 되자 나는 온 거실과 복도, 방 안에 매트를 두 겹씩 겹쳐 깔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항상 주의를 주었지만 이제 갓 돌이 지난 아기들이 그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아이들이 우르르 뛸 때면 항상 도끼눈을 뜨고 어린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뛰지 마! 그때마다 아이들은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주눅 들었고 나 또한 마음이 괴로웠다. 2년의 전세 계약기간이 만료될 때 즈음 나는 남편에게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돈이 들더라도 이사를 가야겠다고 했다. 우리는 집을 내놓았다. 공교롭게 109호도 같은 시기에 이사를 왔고 같은 부동산을 이용하고 있었다.


“1층 집은 바로 재계약했어요. 층간소음 때문에 집을 내놨다는 걸 듣고는 너무 미안해하시더라고요. 좋은 분이시거든요.”


부동산 사장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좋은 사람.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나에게도 그는 좋은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1,2층 나란히 살게 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어딘가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되었더라면, 그는 서늘한 눈빛을 감추고 분노가 담긴 고무망치를 두들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따뜻한 눈빛으로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어떻게 아들 넷을 혼자 키웠어요. 저는 아들 둘도 힘든데. 내가 길가에서 만나는 여느 사람들의 지나가는 말처럼 그도 나에게 따뜻한 눈길로 그 말을 건넸을 것이다. 보편적인 동정은 내가 감내할 수 있는 그 정도로만 이루어지기에. 누구에게든 말이다.     




끝내 오래된 그 아파트는 다른 집에 거래되지 않았다. 나는 정말 울면서 그 집의 계약을 다시 연장하게 되었고 잠시 뜸해졌던 그의 고무망치 소리도, 보복 스피커 소음도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삼 년 반이 흐른 어느 날,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1년 2개월 전 그는 나에게 층간소음에 대한 내용증명을 보냈다. 현재까지 소음을 녹음한 건수는 수백 건에 달하며 자신이 변호사를 고용했고 지금부터 요구하는 사항들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층간소음 소송을 진행하겠다는 골자였다. 남편은 나를 다독였다. 우리에게도 수십 건의 보복 스피커 및 고무망치 녹음 기록이 있고, 기존의 층간소음 판례에서도 보복 소음을 만든 아랫집이 패소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그 종이를 읽는 내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답답함은 앞으로 다가올 소송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남은 계약기간의 적어도 9개월 동안 견뎌야 할 하루하루였다. 조금이라도 뛰거나 시끄러우면 어김없이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러야만 하는 나 자신이 두려웠고, 고무망치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세차게 요동치는 나의 여린 마음도 안쓰러웠다. 무엇보다 엄마가 도끼눈을 뜰 때마다 잔뜩 주눅 들어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가슴 아팠다. 도대체 무엇이 아이들을 위한 좋은 환경일까. 도대체 이 싸움의 피해자는 누구며 가해자는 누구일까. 과연 언제까지 이 기약없는 싸움을 이어가야 할까.




그도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지난한 싸움에 대한 죄책감에서 나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안다. 사실 뉴질랜드로 떠나기 전 109호에 편지를 쓰려고 했었다. 그동안 진심으로 사과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나도 힘들었고, 그만큼 나도 고민했으며, 아들넷을 홀로 데리고 한국을 떠나올 만큼 괴로웠다는 걸 그저 이야기하고 싶었다.  편지를 쓰고 또 지웠다. 결국 그에게 부치지 못했다. 그가 과연 이해해줄 수 있을까. 나의 편지가 또다른 그의 증거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여러 생각이 오갔다. 109호와 209호가 아닌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용기내지 못했다. 도저히 그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109호의 종이 한 장은 나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날로 나는 뉴질랜드행을 결심했고 단 2개월 만에 지긋지긋하고도 지겹게도 정든 그 집을 떠났다. 그리고 비현실적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코로나가 곧바로 터졌고, 남편과 7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언제 재회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미래 아래 오늘 하루를 견디고 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무언가에 쫓기듯 그렇게 나는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작은 마당을 품은 집에 지금 살고 있다. 아이들은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은 우리 집 작은 마당을 좋아한다. 이곳에 작은 놀이터를 마련해주었는데 그네와 미끄럼틀을 타기도 하고, 데크에서 킥보드를 타거나 소풍놀이를 한다.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떠오른다. 그리고 가끔씩은 109호의 서늘한 눈빛도 떠오른다. 그럴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치고 만다.


...아마 다시는 아파트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우리 집 앞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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