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바나는 스래시라기엔 너무 깔끔하고 헤비메탈이라기엔 너무 순수하며, 무시하기엔 너무 좋다.
그랜트 앨든, 1988년 12월 『더 로켓』 <Love Buzz> 리뷰에서
밴드 내부 사정과 별개로 80년대 후반 서브 팝은 너바나를 상대로 간을 보고 있었다. 심지어 브루스 파빗은 그린 리버의 EP 《Rehab Doll》 아트워크에 돈이 많이 들어 자금 흐름이 시원치 않던 회사를 위해 커트에게 200달러를 빌려달라고까지 했다. 재밌는 건 동행을 다시 생각한 쪽이 커트 측이 아닌 서브 팝이었다는 사실. 서브 팝의 두 대표는 88년 6월 5일 센트럴 태번 클럽에서 케미스트리 세트Chemistry Set와 리빙 트레인스Leaving Trains 공연 오프닝 무대를 보고 너바나와 인연을 최종 판단하기로 한다. 결과는 계속 이어나가는 방향으로 흘렀다. 그날 음향 문제로 너바나는 공연에 애를 먹었지만 조나단과 브루스는 무대 앞에서 머리를 흔들고 있었던 것. 서브 팝은 첫 싱글 녹음을 앞두고 들떠 있던 커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로 했다.
6월 11일. 채드가 합류한 지 한 달여 만에 너바나는 레시프로컬 스튜디오에서 녹음과 믹싱을 한다. 프로듀서는 물론 잭 엔디노다. 녹음은 다섯 시간에 한 곡을 끝내는 식으로 신중히 해나갔다. 단, 곡을 두고 논의하는 커트와 크리스 사이에 채드는 끼지 못했다. 그 역시 스스로를 작곡가로 여겼던 터라 이는 채드가 너바나에 오래 있지 못할 징조처럼도 보였다. 밴드는 6월 30일에 스튜디오를 찾아 다섯 시간을 더 녹음하고 7월 16일에 세 시간을 들여 믹싱을 했다. 찰스 R. 크로스가 쓴 커트 평전을 보면 “총 13시간을 들여 네 곡을 완성했다”고 나와 있는데, 너바나의 희귀 음원을 모은 《With the Lights Out》 속지에 따르면 너바나는 이날 밴드의 첫 공식 싱글이 될 <Love Buzz>와 비사이드에 들어갈 <Big Cheese>, <Blandest>와 <Mr. Moustache>, <Sifting (Instrumental)>, <Blew>, <Floyd the Barber>, 그리고 《Sub Pop 200》에 수록될 <Spank Thru>까지 총 여덟 트랙을 완성했다. 이때 특이점은 채드가 스네어 둘을 합쳐서 연주했다는 것인데 한쪽은 윗부분을, 다른 쪽은 바닥을 뜯어내 하나가 된 스네어가 꽤 “우렁찬 소리”를 냈다고 한다.
싱글 <Love Buzz> 재킷 사진은 앨리스 휠러가 찍었다. 트레이시 머랜더의 친구이기도 했던 앨리스는 에버그린 주립대학에 다닐 때 브루스 파빗을 만났다. 88년 8월 마지막 주에 크리스가 자신의 밴으로 시애틀에 있는 앨리스를 터코마로 데려온다. 포인트 디파이언스 공원Point Defiance Park과 내로우스 다리Narrows Bridge 같은 지역 랜드마크들을 다니며 앨리스와 밴드는 사진을 찍어나갔다. 커트는 촬영 당시 독수리가 움켜쥔 뱀 같은 띠에 ‘Live to Ride Motorcycles Ride to Live USA’가 적힌 티셔츠를 입었고, 채드는 펑크 록 밴드 점스Germs의 유일한 스튜디오 앨범 《GI》 커버 아트가 박힌 티셔츠를 걸쳤다. 크리스는 평범한 와이셔츠를 입은 채였다. 그들은 레시프로컬 세션과 비슷한 시간 동안 눕거나 앉거나 걷거나 서서 포즈를 취했다. 앨리스는 이 사진으로 25달러를 벌었다.
커트는 9~10월에 걸쳐 싱글 발매를 놓고 계속 불안해했다. 레이블 터치 앤 고에 “LP 1000장을 찍어내는 데 필요한 대부분 비용과 녹음 비용 전부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말이 포함된 비굴한 밴드 소개서를 보내는가 하면, 마크 라네건(스크리밍 트리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연내에 EP나 LP를 내자는 서브 팝 측 제안은 조나단이 자신들을 다른 레이블로 가지 못하도록 잡아 두기 위한 “빌어먹을 변명”이라고 썼다. 커트는 친구 제시 리드에게도 편지를 써 “서브 팝에 진절머리가 나서 우린 LP를 스스로 발매할 것”이라고 했다. 마침 보잉 구내식당에서 야간 교대 근무를 하던 셸리와 크리스도 따로 살기로 한 때였다. 둘은 헤어졌지만 자주 만났고, 서로를 그리워했다.
이를 악문 커트의 의지가 빛을 발한 것일까. 10월 28일, 시애틀 유니온 스테이션Union Station에서 커트가 우상으로 여긴 기비 헤인즈Gibby Haynes의 밴드 버트홀 서퍼스 오프닝 공연과 이틀 뒤 에버그린 대학 기숙사Dorm K208에서 러시Lush, 랜드샛 블리스터Landsat Blister와 함께 선 할로윈 테마 파티 공연을 계기로 너바나는 조금씩 여물고 있었다. 할로윈 공연에서 크리스는 웃통을 벗은 채 얼굴과 가슴에 가짜 피를 흘리며 베이스를 흔들었고, 커트는 공연이 끝날 무렵 가짜 피를 뒤집어 쓴 채 유니복스 하이플라이어Univox Hi-Flier 기타를 부숴버렸다.펜더 머스탱Fender Mustang 기타를 산산조각 냈다는 말도 있지만, 하이플라이어를 부쉈다는 게 정설이다. 너바나를 거쳐 푸 파이터스의 기타 테크니션까지 맡게 되는 어니 베일리Earnie Bailey의 말이다. “커트는 완전히 기타에 푹 빠진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 퍼포먼스는 다시 기타를 살 형편이 안 되면서도, 공연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고등학생 때 커트는 친구들과 함께 버려진 집이나 비어 있는 집에 들어가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부수곤 했다. 한번은 들판에 있던 집이 밴드 리허설 장소로 안성맞춤으로 보여 빌리려 했지만 집주인이 임대를 거절한 적이 있다. 커트는 친구들과 파티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중 그 집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침입해 집안 물건들을 부수고 창문을 깨며 난동을 부렸다. “(임대 거부에 대한)복수를 한 거였죠.” 커트가 말한 ‘복수’는 그가 세상을 뜰 때까지 너바나 콘서트에서 수시로 목격된다.
88년 11월. 마침내 너바나의 데뷔 싱글 <Love Buzz>가 세상에 나온다. <Love Buzz>는 같은 해 8월 조나단과 브루스가 만든 서브 팝 싱글스 클럽Sub Pop Singles Club을 통해 발매됐다. 이 제도는 1년 동안 35달러를 내고 클럽에 가입한 사람들에게 매달 새로운 7인치 한정판 싱글을 우편으로 보내준 구독자 전용으로, 두 대표가 레이블의 자금 흐름 문제를 해결하려 떠올린 아이디어였다. 채드의 부모님인 버니스와 웨인은 훗날 아들이 자랑스러워 역사가 된 이 싱글을 액자에 담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서브 팝은 너바나의 첫 싱글을 “길들여지지 않은 올림피아의 헤비 팝 슬러지”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커트와 크리스는 서브 팝의 구독자 전용 싱글 클럽 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은 매장에 진열되지 않는 식의 싱글 발매가 탐탁지 않았던 것인데 그래서였을까, 커트는 크레디트에 본명 대신 “자신의 실제 행위나 환경으로부터 멀어질 필요가 있을 때” 쓰던 서명인 ‘Kurdt Kobain’을 올렸다. 사람들은 그가 같은 애버딘 출신 밴드인 메탈 처치의 또 다른 커트Kurdt Vanderhoof를 흉내 내기 위해 그 이름을 썼다고도 보았는데, 에버렛 트루에 따르면 그것은 흉내가 아닌 ‘경의’의 뜻이었다고 한다.
<Love Buzz>는 히트했다. 일일이 번호를 매겨 한정반으로 찍은 1000장이 순식간에 매진된 거다. 이는 그대로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었으니, 아제라드가 너바나 평전을 쓰던 1994년에만 해도 50달러 선에서 거래되던 것이 2024년 8월 기준에선 1만 5천 달러까지 치솟았다. 커트와 크리스가 썩 내켜 않아 했던 싱글이 희귀반이 된 셈이다. “밴드를 위한 매우 효과적인 홍보였다.” 구독자 전용 제도에 대한 브루스의 자평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해당 싱글 클럽 제도에서 최초로 ‘이달의 서브 팝 싱글’로도 남은 <Love Buzz>의 비사이드에 밴드는 처음 <Big Cheese> 대신 “커트가 마지막에 로버트 플랜트 같은 가성으로 울부짖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곡”으로 평가된 <Blandest>를 계획하고 있었다. 선곡이 바뀐 건 엔디노의 조언 때문이었다.
자, 한 번 보자구. A면은 커버 곡이야. 그러니 B면에 담길 첫 오리지널 곡을 모두가 들어주길 바란다면 인상적이지 않으면 안 돼.
엔디노가 듣기엔 <Big Cheese>가 <Blandest>보다 더 활기 넘치는 곡이었다. 너바나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 마크 암도 이즈음엔 저들의 광팬이 되어있었다. “곡을 처음 듣고 인상적이었던 건 커트의 목소리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특징이 있었다.” 커트는 그 형언할 수 없는 ‘보컬의 힘’을 티베트 불교 수도원인 규토 승원 스님들Gyuto Monks에게서 들었다고 생전에 말한 적이 있다. 영적이고 인간적인데다, 에너지까지 겸비했다는 얘기였다. 마크는 커트의 보컬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커트의 “정신적 컨디션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88년 12월. 너바나는 9월 말에 만진 <Spank Thru> 리믹스 버전을 《Sub Pop 200》에 제공했다.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Spank Thru>가 너무 복잡하다고 말했는데, 커트는 거기에 이렇게 반응했다. “우린 단순하고 더 나은 곡을 만드는 쪽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어. 곧 발매할 앨범《Bleach》에는 두 파트로만 구성된 곡도 있지. 그에 비해 <Spank Thru>엔 세 파트가 있는 건데, 저 자식사이먼 레이놀즈이 뭘 알겠어. 기분이 안 좋았나보지!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을 좋아하지 않는 건 확실해 보이는군.”
커트의 컨디션에 비례해 너바나가 자신들 파티에서 공연해주길 원하는 사람들도 계속 늘고 있었다. 가령 12월 21일에 너바나는 멜빈스 팬들 20여 명이 모인 호퀴엄 이글스 홀Eagles Hall에서 레드 제플린의 <Immigrant Song>을 첫 곡으로 “공식적인 홈타운 공연”을 치르기도 했다. 이틀 뒤 데뷔 앨범 녹음을 위해 시애틀로 떠난 너바나. 녹음 전날 밤은 채드의 친구인 제이슨 에버맨 집에서 보냈다.
12월 24일, 너바나는 레시프로컬 스튜디오에서 자정까지 10곡의 기본 트랙을 녹음했다. <Scoff>, <Mr. Moustache>, <Sifting>, <About a Girl>, <Blew>, 원래 제목은 ‘White Trash’였던 <Swap Meet>, <Negative Creep>, <School>, <Hairspray Queen>이 거기에 포함됐다. 나중 《Incesticide》에 실리는 <Big Long Now>도 이때 녹음했다. 일을 끝내고 애버딘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멤버들은 그날 녹음한 걸 내리 여섯 차례를 들었다. 커트는 새벽 1시 반 경, 크리스마스를 엄마와 보내기 위해 웬디 집에 내렸다. 친척들에게 <Love Buzz> 싱글을 돌린 커트. 하지만 웬디는 큰 감흥이 없었는지 “뭔가 다른 일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식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물론 커트는 엄마의 충고를 한귀로 흘렸다.
나흘 뒤 너바나는 《Sub Pop 200》 발매 기념으로 시애틀 유니버시티 디스트릭트University District에 있는 클럽 무대에 올랐다. 작가 겸 스스로가 퍼포먼스 아티스트였던 스티븐 “제시” 번스타인Steven “Jesse” Bernstein은 그날 공연을 보고 “얼음처럼 차갑고 메마른 보컬을 가진 밴드”라는 평을 남겼다. 공연을 끝낸 밴드는 다시 레시프리컬 스튜디오로 가 88년 마지막 날까지 잭 엔디노와 첫 앨범 수록곡들을 스튜디오에서 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