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한 시애틀은 플란넬 셔츠와 흐릿한 찰스 피터슨 사진뿐이었다.
데이브 그롤
한때 서브 팝은 잭 엔디노와 녹음하고 찰스 피터슨이 사진 찍는 일을 필수처럼 여겼다. 그건 다 브루스의 의도였다. 레이블의 정체성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롤모델은 ‘펑크 정신을 가진 재즈 레이블’인 블루 노트나 고도의 양식미와 예술성, 고딕 스타일을 추구한 영국 레이블 4AD보스턴 밴드인 픽시스와 뉴포트 출신 스로잉 뮤지스Throwing Muses가 몸 담았다였다. 아울러 팩토리 레코드Factory Records는 브루스에게 디자인과 프로덕션을 중심으로 한 레이블의 완벽한 예시였으며, SST는 같은 이유레이블의 정체성로 펑크 록 신에서 그가 유일하게 주목한 곳이었다.
브루스가 찰스 피터슨의 사진을 처음 만난 곳은 시애틀 유니버시티 디스트릭트였다. 밴드 룸 나인Room Nine이 머물던 그곳 숙소에 걸린 멤버들의 실물 크기 사진을 본 브루스는 ‘세상에, 이 사진들은 공연 에너지를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신scene 전체를 정의 내리는 시각적 시그니처”로 찰스의 사진을 평가한 브루스는 차라리 음악보다 그 사진에서 영감을 얻어 지역 음반 제작에 뛰어들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브루스에게 찰스의 사진들은 무겁고 섹시했으며, 여러 면에서 당시 유행하던 모든 것의 정반대였다.
찰스는 셔터 드래그Shutter Drag를 주로 썼다. 즉 셔터 속도를 늦춘 상태에서 플래시를 터뜨려 피사체는 선명하게, 배경은 움직임으로 왜곡시켜 드라마틱한 효과를 노리는 사진 촬영 기법이 찰스의 장기였다. 앞서 데이브 그롤이 그의 사진이 “흐릿하다”고 한 건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찰스가 찍은 사진들은 죄다 흑백이었다. “내가 흑백으로 찍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경제적인 이유였고 다른 하나는 고등학교 신문과 졸업 앨범, 그리고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게리 위노그랜드Garry Winogrand 같은 사진작가들 작품이 다 흑백이었기 때문이다.” 찰스가 찍은 너바나의 첫 사진은 88년 여름, 쇼킹 블루<Love Buzz>의 원작자 음악을 배경 삼아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에서 찍은 것으로, 《Sub Pop 200》에 실렸다. 찰스 피터슨은 그 시절 ‘최고의 사진작가’ 또는 ‘사진가의 사진가’로 여겨졌음에도 딱히 좋은 대우는 받지 못한 것 같다. 그때 서브 팝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아트 챈트리의 말이다. “서브 팝은 찰스에게 돈을 한 푼도 주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 브루스와 조나단은 찰스가 공짜 사진을 찍어주는 대가로 자기들 화장실을 암실로 쓰게 해 줬죠.”
그런데 의외로 《Bleach》 재킷 사진은 찰스 것이 아니었다. 회사와 밴드 사이 논의가 오간 끝에 너바나 데뷔 앨범의 얼굴이 된 사진은 89년 4월 1일, 올림피아에 있던 작은 클럽 겸 아트 갤러리 레코/뮤즈Reko/Muse에서 트레이시 머랜더가 너바나 공연 모습을 찍은 것이다. 밴드가 원해 대문이 된 이 사진은 앨범 제목처럼 네거티브로 ‘표백’되어 있다. 서브 팝을 상징했던 '흐릿한' 찰스의 사진은 속지에서 볼 수 있는데, 모델은 베이스 연주 중인 크리스다. 알려진 바로 사진을 찍은 그날은 무대에서 베이스를 높이 집어던져 채드를 깜짝 놀라게 한 크리스가 한동안 떨어져 지낸 셸리와 다시 만난 날이기도 했다.
사실 서브 팝의 ‘이미지 담당자’였던 브루스는 애초 앨리스 휠러가 너바나 멤버 개개인을 무대 뒤 형광등 아래서 찍은 “살갑고 꾸밈없는 사진”을 속지에 넣으려 했다. 하지만 “서브 팝식 포퓰리즘 이론”에 어울린다는 이유로 마음에 들어 한 브루스와 달리, 커트는 앨리스의 사진 속 자신들이 돌연변이mutants처럼 보인다며 탐탁지 않아 했다. “여드름과 수염이 정말 생생하게 보였다. LA당시 유행하던 헤어메탈 밴드들을 가리킨다답지 않은 못생긴 얼굴들, 그러니까 쫄쫄이 바지나 헤어스프레이와 대척점에 있는 평범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거다. 난 이 사진들로 너바나가 ‘진짜’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나에겐 사진들이 이야기의 일부였던 셈이다.” 파빗은 저러한 자신의 철학에 근거해 “교과서적인 서브 팝 스타일로 머리를 휘날리는” 제이슨을 찍은 찰스의 사진을 《Bleach》 뒤표지에 쓰길 원했지만 커트는 그 아이디어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나마 제이슨의 사진은 파빗의 뜻을 부분 반영해, 흰색 바이닐 천 장 한정판 뒤 찍은 《Bleach》 초판 2천 장 백커버로 실었다. 그 후론 커트의 의지인 듯 채드의 드럼 세트 위로 자신이 널브러진 사진을 썼는데, CD 속지 끝에서도 볼 수 있는 이 사진은 1990년 2월 LA에 있던 클럽 라지스Raji’s에서 찰스가 찍은 것이다. 해당 공간은 《Bleach》 재킷 사진처럼 네거티브로 처리돼 훗날 싱글 <Sliver> 뒷면을 꾸민다.
《Bleach》는 우리가 아는 너바나 고유 로고가 태어난 계기이기도 했다. 《Bleach》 표지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뮤지션인 리사 오스Lisa Orth가 서브 팝을 위해 디자인한 마지막 앨범 재킷으로,당시 서브 팝은 리사에게 수 천 달러 빚이 있었다고 한다 알려진 대로라면 리사가 『더 로켓』에서 일한 그랜트 앨든에게 당시 컴퓨그래픽Compugraphic에서만 쓸 수 있던 오닉스Onyx 서체를 부탁했는데, 그랜트는 이미 설치돼 있는 보도니Bodoni Extra Bold 서체로 너바나 로고를 앉은자리에서 뚝딱 만들었다고 한다. “이름이 뭐라고요?” “너바나요.” 조판이 너무 급하게 진행돼 ‘V’자 양쪽으로 눈에 띄는 간격이 있었지만 수정하진 않았다. 그랜트는 ‘너바나 서체’를 만들어주고 15달러를 받았다.
89년 6월 15일. 마침내 너바나의 데뷔 앨범 《Bleach》가 흰색 바이닐 천 장 한정으로 나온다. 이후 《Bleach》는 여러 색깔 바이닐로 발매되는데, 이유는 청구서가 많아지면 공급업체를 바꾸는 것으로 악명 높은 서브 팝의 거래 방식 때문이었다. 가령 호주 워터프런트Waterfront Records에선 파란색 또는 노란색 《Bleach》 바이닐이 유통됐고표지도 파랑, 노랑 잉크로 꾸몄다 89년 8월 12일, 영국 투펠로Tupelo Recording Company는 <Love Buzz>를 <Big Cheese>로 대체한 《Bleach》 영국 초판을 처음엔 흰색 3백 장, 두 번째는 녹색 2천 장으로 유통시켰다. 서브 팝은 같은 달 첫 번째 《Bleach》 카세트테이프와 CD를 발매했는데, 테이프 마지막엔 <Big Cheese>를, CD 끝엔 <Downer>를 배치했다.
《Bleach》에 대해 서브 팝이 쓴 홍보 문구는 《Nevermind》가 터뜨릴 ‘대박’을 아는 입장에선 예언적이었다. “이 올림피아 팝스타들의 최면 같은 헤비니스. 그들은 젊고 밴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커트는 정규 데뷔작 크레디트에도 본명 대신 쓰던 ‘Kurdt Kobain’을 넣었는데, 그건 픽시스의 블랙 프랜시스Black Francis처럼 줄곧 가명으로 활동하고 싶던 평소 바람을 반영한 것이었다. “내 진짜 이름이 뭔지 아무도 몰랐으면 했어요. 언젠가 다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말이죠. 사실 《Nevermind》에서도 다른 이름을 쓰려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냥 본명을 쓴 거예요.”
데뷔작을 낸 너바나는 89년 6월 22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커버드 왜건Covered Wagon을 시작으로 총 26회 투어를 떠났다. 투어 당시 커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짜로 미국을 구경하고 있고, 하루 두 시간만 일하면 되니까요.” 이 투어는 밴드의 첫 미국 ‘메이저’ 투어이면서, ‘The Van’으로 불린 그들의 흰색 닷지 밴을 타고 떠난 첫 번째 투어이기도 했다. ‘The Van’은 세 차례 미국 투어 길 7만 마일을 달리는 동안 단 한 번도 고장 나지 않았다고 한다.
투어를 떠난 이튿날, 너바나는 LA에 있는 리노 레코드Rhino Records 매장에서 공연했다. 하지만 열띤 퍼포먼스와 달리 그날 가게에는 《Bleach》가 다섯 장 밖에 없었다고. 이 영상은 비록 조야한 화질일지언정 유튜브에서 누구나 볼 수 있다. “할 만큼 해봤다. 도피성 복용은 하지 않는다.” 커트는 LA에서 팬진 『플립사이드』가 마약에 대해 묻자 저렇게 답했다. 이는 “마약 사용은 인정하고 싶든 아니든 도피 행위”라고 했던 자신의 발언과 모순된 얘기였다. 그리고 이후 행보에서 저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게 철저히 드러난다.
정말이지 계속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역사상 이렇게 팔리고 또 팔리는 음반은 본 적이 없었어요. 《Bleach》는 아마 엘비스의 선Sun Records 세션 이후 최고 투자 수익률을 기록한 앨범일 겁니다.
브루스 파빗
서브 팝이 1991년 9월까지 4만 장 이상 팔렸다고 추산한 《Bleach》. 이젠 역사가 된 이 앨범을 한 곡 한 곡 감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