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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부르는 케이팝, 이대로 좋을까

by 김성대
케이팝 가사에서 '케이'가 사라지고 있다. 사진=롤링스톤.


한국인은 한때 자신들의 팝을 가요라고 불렀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 일본이 에이치오티 음악을 부르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 케이팝(K-Pop)이 일본어에서 유래한 가요(歌謡, かよう)와 차별 짓는 장르 용어로 등장했다. 그것은 음악 장르이기 전에 “수출을 위한 브랜드”였고, 한류를 대표하는 ‘케이 컬처’의 선봉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케이팝이 그렇게 특별한 뜻을 지닌 것도 아니다. 한국 사람들이 너무 큰 의미 부여를 하고 있어 그렇지, 케이팝은 ‘한국에서 유통되는 대중음악’을 가리킬 뿐이다. 다만 대중음악의 폭이 아이돌 출신 뮤지션 또는 아이돌 그룹 음악에 편향돼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즉 ‘K’는 곧 한국이다. 이걸 떼어내면 특정 국가를 전제한 장르의 정체성은 모호해진다.


근래 케이팝의 노랫말이 ‘영8 한2’ 현상을 보이고 있다. 영어가 80퍼센트, 한글이 20퍼센트란 얘기다. 아예 영어만 쓰는 케이팝 곡들도 적지 않다. 케이팝은 단순한 음악 장르를 넘어 나라가 후원하는 문화 현상이다. 해묵은 민족주의를 등에 업고 세계 시장으로 뻗어가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케이를 붙인 이유도 그것이었고, 케이를 뺄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영미권 음악 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제이팝(J-Pop)에 ‘제이’가 붙은 이유는 일본 사람이 일본 말로 노래를 불러서였다. 제이팝 음악가들은 일어를 포기하지 않는다. 되레 더 적극적으로 부른다. 그들 노래에서 영어는 양념이고 주 메뉴는 늘 일본어다. 그래야 ‘제이’팝이기 때문이다. 케이팝도 응당 그래야 한다는 생각은 다소 보수적일 수 있지만, 그렇다면 팝 앞에 굳이 케이를 붙여야 하는 이유란 무엇일까. 단지 퍼포머가 한국인들 위주라서? 회사를 세운 사람들이 한국인이어서? 케이팝 창작 집단을 외국 송라이터들이 주도한 지는 이미 오래이니 논할 것도 없겠다. 저런 식으로 한국에 있는 회사가 한국인들 위주로 팀을 만들어 내놓는 음악이란 이유로 케이팝이라 부른다는 건 어딘가 궁색하다. 나라 이름을 장르 이름에 넣으려면 그것만으론 부족해 보인다. 여기서 불거지는 문제가 국경을 나누는 가장 고전적이고 확실한 기준, 바로 언어다. 우린 한글을 쓰기 때문에 ‘케이(Korean)’인 것이다.


'글로벌 케이팝' 시대를 열어젖힌 싸이의 '강남스타일' 가사는 90퍼센트 이상이 한글이다.


‘강남스타일’을 기억해야 한다. 싸이는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까지 한 계단을 남겨둔 시점에서 예정된 대학 축제와 서울시청 광장 무료 공연을 치르러 귀국해 이렇게 말했다.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건 한국 대중의 너그러움이었습니다.” '강남스타일'은 몇몇 추임새로 터져주는 단발성 영어를 빼곤 철저하게 한국말로 가사를 쓴 ‘한글스타일’ 노래다. 영어를 써서 외국인들 마음을 사로잡아 글로벌 히트곡이 된 게 아니다. 그건 탁월한 매체 활용 능력과 아이디어의 승리였고, 한글 노래로도 얼마든지 빌보드 정상을 노릴 수 있다는 무한의 가능성이었다. 싸이가 물꼬를 튼 한국적인 케이팝의 성공, 그 꼭짓점엔 물론 ‘케데헌’의 ‘한국스타일’이 있다. 해외 케이팝 팬들이 괜히 돈과 시간을 들여 한글, 한국 문화를 배우려 드는 게 아니다. 또 한글을 전공한 일본 언어학자가 심심해서 우리 언어의 된소리가 케이팝의 “보이지 않는 음표”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퍼플키스의 ‘Sweet Juice’ 가사를 놓고 “영어에도 프랑스어에도 러시아어에도 일본어에도 없는” 한글 자음군이 주는 짜릿함을 설명하는 게 아닐 것이다.


과거 모 국내 음악가가 영어에 목매는 한국을 보며 “이럴 바엔 차라리 미국의 51번째 주로 들어가는 게 나은 것 아닌가”라는 말을 해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분명 너무 나간 발언이었지만 저 말엔 일말의 진실도 녹아 있다. 조기 교육을 명분으로 우리말보다 남의 말(영어)을 먼저 가르치는 요즘 세태는 그 진실의 뚜렷한 단면이다. 그걸 반영하듯 혹자는 요즘 세대가 영어를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케이팝 가사가 영어로 가도 괜찮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저 말은 그 가사가 한글이라면 한국인들이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저 언급은 케이팝 소비층을 ‘요즘 세대’에 묶음으로써 장르의 확장 가능성에 한계를 짓고 있다. 과연 케이팝 기획사와 아티스트들이 그걸 바랄까.


70대이신 내 어머니를 포함해 이 땅의 많은 중장년층이 BTS를 알고 지지하는 이유는 ‘국위선양’ 때문이다. 그들은 BTS 음악을 잘 모르고, 모든 가사를 영어로 처리한 정국의 솔로 앨범은 더더욱 모른다. 그저 저들이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해외에 알리는 사실을 대견해할 뿐이다. 본사가 한국에 있고 가수들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케이팝이 아니다. 영어 가사의 불가피성은 더 크고 더 벌려는 비즈니스 논리일 뿐, 케이팝을 바닥부터 지탱하는 '한국'이라는 본질을 흐린다. 케이팝의 케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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