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추얼은 말 그대로 ‘가상’이다.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처럼 인지하게 만드는 것. 이는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보단 기술에 대한 호기심과 기술력을 향한 감탄의 영역에 더 가깝다. 가상 아이돌의 경우, 이들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굳이 이들을 찾거나 익숙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진짜 사람인 휴먼 아이돌들이 도처에 넘치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 가상 케이팝 걸그룹을 표방하는 이터니티를 보자. 그들에 적용한 딥리얼AI(가상인물 자동화 서비스) 기술, 즉 수십만 장의 얼굴 데이터를 활용해 0.6초 만에 가상 얼굴을 만들 수 있는 건 업체의 기술적 성취이지, 아이돌의 예술적 성취는 아니다. 하물며 이들의 콘서트는 “초대형 고해상도 LED와 3D 이머시브 사운드 시스템이 설치된 몰입형 상영관”에서 해야 하고 “AI 싱잉 보이스와 3D 모션 캡처를 활용해” 현장감도 살려야 한다. 아울러 이터니티의 세계관을 반영한 미디어아트까지 전시해야 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을 현실에 존재케 하기 위해선 너무 많은 옵션이 필요하다. 그 자체가 현실인 진짜 사람 아이돌들을 두고 이런 수고를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어떤 시대든 10~20대는 새로운 걸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이 일상이었거나 스마트폰이 태어날 때부터 있었을 ‘잘파세대(Z세대+알파세대)’에게 가상 아이돌이 이질감 없이 받아들여질 거라는 해석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순수 AI를 앞세운 메이브와 이터니티, 에스파의 업그레이드로 평가받는 인간과 AI 혼합형인 슈퍼카인드가 등장하는 이유 역시 잘파세대가 이끌어나갈 미래 시장을 긍정적으로 내다본 업체들이 미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내놓은 상품들이다. 하지만 가상 아이돌의 표정과 감정, 인생은 어디까지나 입력되고 학습된 것.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건 사람에게 다가가야 하는 가상 아이돌 모두의 숙제요 한계다.
사실 가상 아이돌의 가능성을 선두에서 증명하고 있는 이세계아이돌, 플레이브 같은 2D 사례도 애니메이션이라는 오래된 매체를 통해 이미 소비자들이 경험했다는 점에서 딱히 특장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들에겐 다른 가상 아이돌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진짜 사람’이 본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사람 팬들의 안목(오디션)으로 멤버가 구성돼 성장하고 있고(이세계아이돌), 휴먼 보이밴드들처럼 예능감을 뽐내며 사람 팬들과 소통을 한다(플레이브). 이들이 기존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다른 점은 2D 캐릭터만 빌린 ‘실존하는 인간’이라는 점, 따라서 사람 대 사람으로 팬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쌍방’이라는 점이다.
어제(8월 20일) 발표한 플레이브의 신곡 ‘Pump Up The Volume!’을 들으며 나는 이들이 더 사람 세계를 지향하는 가상 아이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개러지 록이라는 장르 자체가 일단 사람 냄새 나는 장르를 논할 때 둘째라면 서러워 할 음악에, 손때 묻은 바이닐 이미지를 내세운 커버 아트워크, 박명수의 뮤직비디오 출연, 아울러 록 밴드 편성과 댄스 그룹의 군무를 동시에 취하는 입체 전략에서 이들은 여타 AI 아이돌이 다가서기 힘든 인간 세계 감성을 자신들의 질서 아래 줄 세우고 있다. 곡이 나온 뒤 곡에 관해 2시간 넘게 자체 쇼케이스를 진행하는 ‘쌍방 소통’의 예능감은 또 어떤가(‘오류’를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승화시키는 건 인간 본체가 아닌 이상 쉽지 않을 센스다.) 아무리 ‘본체의 존재를 알려 하지 말라’는 가상 아이돌 세계의 암묵적 약속이 있다손, 이들이 휴먼 본체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저러한 실시간 토크쇼는 불가능할 팬서비스다.
물론 휴먼이든 가상이든 손에 닿지 않는 ‘스타’라는 건 마찬가지이긴 하다. 여기서 가상 아이돌의 장점이 부각하는데, 이른바 ‘사람 리스크’다. 가령 가상 아이돌은 음주운전의 위험도 없고 팬덤을 배신하고 열애설을 터뜨릴 일도 없으며, 불편한 과거사를 들출 필요도 없다. 윤리적으로 완벽한 설정이 가능한 만큼 이들은 불편한 구설수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심지어 이들은 (필요에 따라 연출은 가능할지언정)아프지도, 늙지도 않는다. 회사 차원에서 오로지 기획, 개발에만 매진하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완벽함에는 어딘지 모를 서늘함, 즉 인간의 온기가 없다는 게 숙제였다. 플레이브와 이세계아이돌은 그 온기를 휴먼 본체로 풀어낸 셈이다.
본체가 사람인 이세계아이돌과 플레이브의 남다른 인기는 따라서 우연이 아니다. 사람 냄새가 나고 사람으로서 소통이 되기 때문에 가능한 ‘덕질’이다. 물론 이 모든 걸 만들고 펼치고 관리하는 존재 역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겠다. 팬들이 본체에 무심하다 한들 가상의 뒤엔 현실을 사는 누군가의 의지가 있고 타산이 있다. 메타버스와 비대면이라는 익숙한 일상도 결국엔 사람의 일상이다. 저들의 미래는 과연 어디로 향할까. 악동뮤지션과 아이브를 제치고 ‘멜론의 전당 3관왕’ 달성이 반짝하고 말 기술력의 전시가 될지, 아니면 호감에서 반감으로 이어지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를 넘어 사람 아이돌 그룹을 위협할 현실 위의 가상이 될 지는 계속 지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