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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의 1의 나

김승희 산문선 <4분의 1의 나와 4분의 3의 당신>

by 유무하

여러 가지 이견異見이 있겠지만

우리가 한 사람을 규정할 때 보통 정신과 육체로 구분한다.

흔한 말이지만

우리의 몸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만든다.

세포를 구성하고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우리의 정신은 무엇으로 만들어질까?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이의 영향을 받고 산다는 것,

두말하면 잔소리다.

어릴 때는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겠지만,

사춘기가 지나고 나서부터는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젊은 시절 인간과 세상이 궁금해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만 나열되어 있는 '철학책'만 들여다보았다.

그러던 내게

'김승희'의 문장들이 들어왔다.

오래전 <문학사상>에 연재되고 있던 '33세의 팡세'

그녀의 시집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미완성을 위한 연가>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또 그녀의 산문집 <4분의 1의 나와 4분의 3의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나를 만들어가는지 말하고 있다.


그런 아름다운 자아, 나我 자신보다 훨씬 이상적이고 사랑을 통해 완성된 자아라는 것은 그러므로 나 혼자, 나에 대해, 나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4분의 1의 나와 4분의 3의 당신이 만든 것이다.
아니, 4분의 3의 당신들이 나에 대해 꿈을 걸고 사랑을 걸고 나에 대한 욕망을 반영해 줌으로써 4분의 1의 내가 만들 수 있었던 이상적 영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런 나로 살고 싶다', '나는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라고 느끼는 자아개념이란 나 자신의 홀로의 힘에서가 아니라 타자들의 꿈 · 사랑 · 욕망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개념 속에는 4분의 3의 당신들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때의 '당신들'은 곧 상상계 속의 타자들 - 엄마, 아빠, 이모, 고모, 외할머니, 할머니 등 나를 사랑해 주고 그 사랑의 확대경으로 나의 나르시시즘적 자아를 실제의 나보다 더 아름답게 반영해 주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그와 그녀'등의 3인칭의 객관적 존재가 아니고 나와 아직 분리되지 않은 2 인칭적 존재, 즉 당신들인 것이다.
<4분의 1의 나와 4분의 3의 당신> 113쪽 인용

우리가 읽은 문장, 우리가 본 영상, 우리가 들은 이야기를 엮어 나의 정신을 만든다.

그러니 나는 진정 나가 아니다. 4분의 1이 아니라

10분의 1 아니면

100분의 1이 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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