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에 대한 예의
물건을 사는 것이 두렵다. 좁은 집 때문에 언제부턴가 스며든 버릇이겠지만, 그 중간 어디쯤 공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며 자리를 물건에게 내준다는 것도 비용이라는 생각이 떠오른 후로 더욱 두려워진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게을러서 버리기를 귀찮아할 걸 아는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도 한 손 거들기도 했고. 그러나 가끔 물건을 이유 없이 사고 싶은 날이면 타인에게 필요한 작은 것들을 사기도 한다. 온전히 사는 행위만 목적으로 하고 물건을 소유하지 않을 때는 이상한 만족감과 박탈감이 동시에 들지만 현명한 선택이었다며 스스로를 안도한다. 이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집에 물건이 넘쳐나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욕망의 덩어리여서 일까.
그렇지만 공간을 아끼지 않는 하나의 품목이 있다면 그것은 잠옷이다. 계절에 하나씩은 잠옷을 구입하는데, 가끔 두 개를 살 때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재질이다. 재질. 무엇으로 만들어졌느냐. 잠옷은 면 100%로 만들어졌어야 한다. 몸에 닿는 촉감과, 특히 여름에 순면 잠옷이 주는 시원함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부럽지 않게 만든다. 땀 흡수율과 순면이 주는 깨끗함과 뽀송함.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을 때의 안도감. 그리고 무엇보다 순면은 옷의 형태가 잘 흐트러지지 않아서 오래도록 입어도 잘 낡지 않는다.
잠옷을 대할 때 중요시하는 다음 항목은 디자인인데, 꼭 카라에 단추가 달린 파자마의 형태를 하고 있는 바지 잠옷이어야 한다는 것. 치마 잠옷은 여름엔 훨씬 시원하고 편할 것 같아도 누워서 뒤척이며 자다 보면 말려서 올라가고, 이불에 끄달려가고, 내 몸을 감싸주지 못한다는 큰 단점 때문에 기피 대상이 된다. 왜 카라가 달린 단추여야 하느냐. 잠옷은 그 특성상 자주 빨아주어야 한다. 잠옷에 만일 레이스가 달려있다면 그 빈번한 빨래의 횟수를 감당하지 못한다. 말려 올라가고, 쪼그라들고 몇 번 입지 않아도 볼품 없어진다. 단추가 달려있어야 하는 이유는 아침에 메이크업을 하고 옷을 벗을 때, 화장품이 묻지 않게 하기 위해서. 거기에 너무 여성스러운 디자인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개인적인 취향도 있기 때문이다.
잠옷을 사기 시작한 건 문득 자고 일어나 머리는 자유롭고 옷은 다 늘어진 티셔츠에 무릎 나온 바지를 입고 있는 거울 안의 모습이 놀랍도록 못나 보였을 때부터 였다. 그 모습이 매우 불편했다. 집에 서식하는 사람으로서 집에 있는 그 긴 시간 동안, 어쩌면 내 인생의 5할 이상의 시간을 이 모습으로 보내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무의식에 대한 스스로의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편하고,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는 시간을 무관심하고 될 대로 되라는 듯이 보내는 태도. 자신의 모습이 불편하지만, 못 본 척하는 외면. 그날부터 잠옷을 샀고, 천천히 취향이 정해지기 시작했다.
매일 입는 잠옷에 대한 투자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편한 시간에 대한 예의이며, 무의식에 대한 존중이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의 자신에 대한 존경이다. 가장 오랜 시간 입고 있는 옷이기 때문에 굉장히 합리적인 소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