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돋이 Sep 07. 2017

공원

도시형 인류의 보루

 고전경제학에서부터 시작해서 현 자유 시장체제의 기반이 되고 있는 경제학의 인간론은 인간이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했을 때 최선의 합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경제적 동물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가정은 슬프게도 일련의 공황과 위기를 겪으며 수정되고 있다. 합리적인 선택은 어쩔 수 없이 감정을 배제한 상태에서만 일어나는 데, 인간이 감정을 배제하는 것보다 AI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더 쉬운 일이라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관련된 어떤 책의 목차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도시계획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그것의 인간론은 (특히 한국에서의 도시계획의) 고전 경제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으로 감히 추측한다. 물론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시행되는 것에서 그렇게 드러날지도 모르지만. 싸이 덕분으로 한국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강남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 코스피 1위 기업이 떡하니 버티고 있고, 그 건너편에는 토익 학원, 공무원 학원, 편입 학원이 즐비하고, 그 근처에는 세기에도 너무 많은 술집이 동틀 때까지 영업을 하는데, 그 옆에는 녹색 어머니회가 등하교 지도를 하는 초등학교가 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한 블록 뒤에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비싼 아파트가 떡하니 서있고, 그 아파트로 들어가는 골목에서 백발 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트랜스젠더 바와, 호스트바, 텐프로가 반짝거린다. 그리고 기형적일 정도로 많은 커피전문점들이 누군가 위에서 흩뿌린 것처럼 들어서 있다. 누군가 듣는다면 서울 전 지역을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강남대로 사 차선의 정중앙에서 반경 500m 이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엘리스가 다녀온 곳보다 더 기묘한 이곳에서 가장 이상해 보이는 것은 보도블록에 갇힌 채, 멀뚱히 키 만 큰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나무들이고, 그 나무들이 목숨만 연명하게 깔린 흙들이다.



  아무래도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을 흙 없이도, 나무 없이도, 흐르는 물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 넓은 레고 안에 갇혀서 플라스틱과 비닐에 담겨 나오는 정제된 음식과,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물과, 타이어 냄새를 실은 공기만 있어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확신하며 말이다. 인간을 합리적인 경제적 소비를 하는 존재라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라고 증명되어 간다. 그러나 인간이 아스팔트 속에서 집까지 퇴근하는 길에 녹지 한 줌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그것에 대한 어떠한 반론도 드러나지 않는다.


 부끄럽게도, 나는 환경운동가이거나, 채식을 한다거나, 혹은 산에 틀어박혀 사는 사람도 아니다. 내 손으로 일군 것을 먹고, 계곡에 발을 담글 수 있는 환경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더 나아가 이 도시의 한 복판에 버티며 살고 있다. 일 년 일 년 해를 넘겨 가면서, 도회적이고 세련됐던 이 환경이 이제 목을 조여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양서류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근처의 숲이 우거진 공원에 나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반나절은 앉아있어야, 다시 도시로 나갈 힘이 생긴다. 마치 개구리가 물 밖에 나가 먹이를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로 돌아와야 하는 것처럼, 도시라는 건조한 환경에 살기 위해서는 물에 몸을 적시듯이 흙과 나무와 신선한 공기에 몸을 담가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울해하는 몸과 예민해지는 정신을 가늠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며, 내 안에 에너지가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극단에 가기 전에 충전을 시키는 것이 버릇이 됐다.


 도시의 삶에서 공원은 마지막 보루이다. 사막에서 기를 쓰고 만들어 놓은 한 줌의 인공 저수지이다. 인간이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만들어 놓은 마지막 한 발자국이다. 공원을 매일의 일상에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넘쳐나겠지만,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자연인 신체를 가지고 있고, 이성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조심스레 의견을 개진하고 싶은 점은 우리가 자연이라는 것을 너무 잊고 살지는 말자는 점이다.


 주변에 얼마나 많은 녹지가 있는가가 이사의 가장 큰 요인이었을 때, 문득 일조권처럼 녹지권도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의 실현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떠나서, 이유 없이 피곤하고 우울하고 서러운 사람들이 있다면 얘기해 주고 싶다. 당신은 푸르름이 필요한 것이라고.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알려줄 나무 냄새가 섞인 바람과, 파르르 우는 잎의 울음과, 선명해서 마음을 쨍하게 만드는 하늘과, 걸음에 바스스 거리는 작은 모래들이 피우는 간지럼의 위로를 들어야 하는 순간이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연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