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민 작가님의 <이렇게 일만 하다가는>을 읽고
처음 책을 만난 건 회사 동료분의 책상에 놓여 있던 때였다.
표지와 제목을 보고 상상한 것은 번아웃에 관한 책인가? 이렇게 일만 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책인가? 등등 일에 대한 희로애락이 담긴 책이리라 생각했다.
뭐랄까, 이 분이 벌써 회사 일에 번아웃이 온 것인가 하는 막연한 상상을 했다.
그러다 책에 대해 물었고, 다 읽었다며 선뜻 "읽을래요?" 하며 내게 넘겨주었다.
여행 에세이라는 소개에 일과 여행지에서 느낀 것들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하며 의아했었는데
일만 하지 말라거나, 일을 열심히 해라 또는 여행을 떠나라! 와 같은 결론을 내려주는 책은 아니었다.
그렇게 책을 다 읽고 나서 문득 든 생각은,
언젠가 평범하게 삶을 살다가 문득 떠나고 싶다라거나 삶이 조금 지루해진 시점에 책의 어디든 펴서 훌쩍 떠날 수 있겠다 하는 것이었다.
교훈을 주는 책은 아니었다. 그러려고 쓴 글도 아니었던 것 같고.
그저 잔잔한 책이었고, 그러면서도 여행지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드는 책이었다.
작가님의 여러 독백과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내게 울림을 주었던 문구들을 가지고 생각 조각들을 펼쳐내보려고 한다.
⚠️ 책의 주요 문구가 포함된 글이므로, 스포가 (당연히) 있습니다. 책이 궁금한 사람은 일단 읽어보고 올 것!
“나도 잘 모르지만 어쩌면 모른다는 것이 포인트일지도 몰라 일단 가만히 앉아서 머릿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봐. 그러면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생각이나 의문들이 떠오르고 흘러가겠지? 명상은 그것들을 따라가거나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지 않고 그냥 계속 지켜보는 거야. 그런데 우리 마음은 자꾸만 해답이나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냥 보고만 있는 게 쉽지 않아. 그럴 때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모른다’인 거지.”
”어떤 생각이나 의문에 휩쓸려 가려할 때마다 당신은 ‘모르겠다’라고 대답하는 거야. 그 말을 칼처럼 사용하는 거지. 그렇게 휩쓸림을 끊고, 다시 지켜보기 모드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명상이야.” -19p
어떤 문제를 만나고, 문제의 해결책을 떠올리기 위해 여러 생각들을 하고, 하고, 또 하다 보면 어느새 처음보다 더 복잡해져 있는 순간을 마주할 때가 많다.
인생에 있어서 뭐든 명쾌한 순간은 오지 않을 수 있다.
A or Not, A or B 뭐든 그렇게 딱 나눌 수 있다면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그레이존은 없을 것이며 인생의 많은 부분에서 싸움은 사라질 것이다.
가끔 엉켜있는 끈을 풀기 위해 노력하지만 풀려고 할수록 더 꼬여버리는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지만 그만큼 더 문제가 생기는 그런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냥.
그냥 "아, 모르겠다."하고 잠시 문제에서 떨어질 것, 그리고 잠시 지켜보기 모드로 돌아오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어느 때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은 오겠지만
문제에 너무 매몰되어 치우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잠시 떨어져서 보다 보면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어찌 되었든 몇 번째 계속해서 똑같은 패턴의 충고를 듣다 보니 왠지 약사 같은 건 빨리 때려치우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을 그만둬야 뭔가 재밌는 일을 찾아 더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처럼.
…
사람들은 손 닿는 곳에 있는 것들을 끌어모아 자기의 세계를 만들며 살아간다.
하지만 한 인간이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단지 놀 줄 모르기 때문이라는 아구스틴의 확신처럼 주위의 확언이나 평가는 종종 의심스러운 기준에 근거하고 있다.
한 곳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가 다른 속에 가면 엉뚱한 소리가 되는 일도 생긴다.
나의 세계를 서둘러 좁게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책을 읽고 여행하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그 결과 나의 세계가 대단히 넓어지고 내가 인간적으로 성숙했는가 하면 또 그런 건 아니지만 일단 내 손에 닿는 것이 그 정도였다.
- 23p
요즘 여러 갈래로 고민과 생각의 방향을 나누고 있다. (늘 감사한 P1)
내 생각을 존중해 주고, 나의 고민을 온전히 들어주는 사람들이라 인생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는 않는다. 다만 어찌 되었든 계속해서 비슷한 류의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여러 관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왠지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고민을 하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그 일을 그만둬야 뭔가 재밌는 일을 찾아 더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처럼'
'사람들은 손 닿는 곳에 있는 것들을 끌어모아 자기의 세계를 만들며 살아간다'
그 사람은 원래 그래라고 누군가 단언하는 순간, 누군가의 세계에서만큼은 그 사람의 존재가 결정지어진다.
그렇지만, 결국 그건 그 사람의 세계이지 나의 세계는 아니다.
그 의심스러운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출 필요는 없다. 어느 누구도 '나'와 완전히 같지는 않기에, 결국 어떤 말을 듣든 내가 결정을 내리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뭔가가 끝나야 새로운 게 또 찾아오는 법이다.
그렇지만 꼭 끝나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은 또 만들어질 수 있다.
그 모순 같지만 진리인 것 같기도 한 이 말은 아직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 모르겠다."
“기존의 생활을 버리려니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그걸 극복해야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알고요. 선생님은 안정된 생활을 버릴 만한 대안을 찾으신 거죠?”
”난 그런 건 잘 모르는데.”
…
모른다는 말, 그때 그 말 바닥에 있는 그의 마음을 나는 언뜻 느꼈다.
수많은 고민과 질문과 선택 끝에 내려졌을 절박한 결론.
그것이 그의 답이라면 나의 고민은 너무나 얕고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고민의 해결책을 찾고 못 찾고 가 아니라 해결책을 찾으려 헤매는 집착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 70p
“나도 질문이 하나 있어. 와이 아 유 리브?”
’ 나는 왜 사는 것일까?” 질문을 되뇌며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지만 적당한 대답은 찾아지지 않았다.
’ 태어났으니까 그냥 사는 것일까?’ ‘깨달음을 위해 이런저런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일까?’ ‘내 인생에도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는데 내가 아직 찾지 못한 걸까?’
- 47p
비록 책 속에서는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이 한 잘못된 질문이지만(where are you from?을 질문하고 싶었던 것으로 다시 나옴) 글쓴이에게도, 나에게도 이 문장은 제법 울림이 있는 질문이었다.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낭만적인 질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질문이다.
글쎄, 왜 사는 걸까?
그냥 살아가다 보니 살아지는 걸까?
한 번뿐인 인생인데, 무엇을 위해 그리고 무엇을 향해 살아가는지 고민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고, 책을 덮은 뒤에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지는 못했다.
아마 계속해서 고민을 하게 될 질문이겠지.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나의 결론이 저 비장하기까지 한 질문에 한 스푼의 낭만은 넣어져 있기를 바랄 뿐이다.
꼭 필요하지 않은 뭔가를 필요한 것처럼 포장해야 하는 상황들이 나를 조금씩 지치게 했다.
그리고 결국 거기에 적응하고 나면 내 안의 뭔가가 크게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 불안했다.
그래도 내 길이든 아니든 또래 친구들보다 벌이는 좋았기 때문에 위험 요소를 무시하며 몇 년 동안 그 일을 계속했다. 어차피 다른 길을 찾아낸 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이게 아닌데 하면서 끌려가듯 하는 일에는 깊이가 없다.
깊이가 없어서 오래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인생에는 이런 것 이상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 67p
젊었을 때는 기력이라는 ‘장난감 연료’를 사용해서 사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늦어도 삼십 대에는 마쳐야만 한다.
기력을 상실하고, 더욱 그것이 만성이 되어 살아가기조차 부족할 정도로 기력이 저하되는 순간,
그때부터가 진짜 탐구의 시작이다.
기력이 가득 차 있는 인간의 탐구 따위는 그 탐구 대상이 무엇이든 살아갈 기력과 그 동기 부여의 ‘연료’나 ‘거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연료가 떨어졌을 때 그것이 탐구의 시작이다.
…
장기적으로 무위 할 것, 게으름뱅이일 것, 철저하게 칠칠맞을 것, 무엇을 하여도 귀찮을 것, 살아갈 기력에 쪼들릴 것, 이런 인간은 단지 살아남고자 하는 충동만 염두에 두는 사회적 입장에서 보면 단순히 무능하거나 바보로 간주된다. 그러나 뜻밖에도 ‘타오’에서는 바로 이런 인간만이 문을 여는 것이다.
- 81p
어렸을 때는 남는 것이 체력이다.
밤새 술을 마시던, 밤새 팀플을 하던, 하루의 이벤트를 위해서 몇 날 몇일의 기력을 쏟아붓던 모든 것이 새롭고 재밌고 열정이 넘친다.
나는 그것이 나의 기질인 줄 알았다.
그러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고, 체력이 바닥을 치던 순간 딱 깨달았다.
아 이전까지의 나는 그냥 몸의 기력을 갈아 넣어서 살아가고 있었구나, 그리고 기력은 무한동력처럼 계속해서 끌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거기서부터 보다 진지하게 선택과 집중을, 그리고 내가 지켜야 할 낭만과 포기해야 할 열정을 구분 짓기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제 서른을 달려가니 아직 멀었다, 더 깨지고 부딪혀야지!)
'기력이 가득 차 있는 인간의 탐구 따위는 살아갈 기력과 그 동기 부여의 '연료'나 '거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연료가 떨어졌을 때 그것이 탐구의 시작이다.'
살짝 두렵기도 하다. 무엇을 탐구하는가.
연료가 다 떨어졌을 때 나는 무엇을 동기부여 하며 살아갈 것인가.
어떤 것이 장기적으로 무위 하고, 게으름뱅이가 되고, 살아갈 기력에 쪼들리는 것인가.
'열심'이 그저 '열심을 다하는 것'이 아닌 그 너머의 것이 있는 것일까?
아직은 막연하다.
“어제와 다른 것은 없어. 그렇지만 기분이 그래. 내일이 와버리면 아무것도 아냐”하고 노래하고 있었다.
…
나는 막 스물네 살이 되려 하고 있었고, 인생에 대해서도 조금 알 것 같은 마음이었다.
아주 조금. 앞으로도 이런 일의 반복이 기다리고 있겠지 하는 마음. 그러나 어찌 됐든 거기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겠지 하는 마음.
- 104p
무엇도 두렵지 않았고, 아무것도 아쉽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에 내가 나라는 것이 너무나 절실하여 그 이유만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내 속에서 터져버린, 근원을 알 수 없는 불길로 창고를 통째로 불태워 날려버리고 싶었다.
- 130p
어느 날엔가, 문득 깊게 침잠하는 순간들이 온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다가 번아웃으로 정의되어 한껏 생각의 타래 속에 빠져 있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아주 개운해져서 갑자기 새벽 기상해서 명상하거나 러닝을 나가기도 한다.
순간에 들어오는 문장 하나하나가 깊게 마음에 박혀오는 순간들이 있다.
아마 훌쩍 여행을 가는 것도,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는 순간에 빠져드는 것도 모두 이런 순간들이 왔던 것이었겠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길로 창고를 통째로 불태워 날려버리고 싶은 순간.
그럴 때는 그냥 나에게 집중한다. 계속 생각하고, 글을 쓴다.
어떤 식으로든 풀어내고야 만다.
결국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어떻게 끝내는 건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건지 그런 건 하나도 모르는 그저 생각이 흘러가는 순간에 내 몸을 맡기는 순간들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은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일이다. 그럴 에너지가 있으면 나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들여다보는 데 사용하는 편이 낫다. 최소한 그때 기분은 그랬다.
- 240p
작가의 말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갑니다. 글 쓰는 일은 사랑하는 일처럼 꼭 안 해도 살 수 있지만, 하면 세상이 달라지는 삶의 가능성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이야기를 따라가던 당신이 문득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는 순간일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떠나고 또 돌아와 당신의 이야기를 해주실 수도 있겠죠.
- 291p
결국 모른다는 말로 흐리게 결론을 내버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다시 고민을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민을 나누면서도 나의 생각을 어쩔 줄 몰라하는 나라는 사람에 치여서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가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비일상에서 낭만을 느끼고, 평화로움을 느낀다.
그러다 보면 다시 일상으로의 복귀가 두렵지 않게 된다.
책에서 나오는 여러 글을 읽다가 문득 알래스카를, 겨울의 페어뱅크스를 검색하게 됐다.
또 문득 파리의 자유로움을 상상하고 그 속에 녹아들어 있는 나 자신을 떠올리게 됐다.
이 책은 그런 책인 것이다.
어느 순간 문득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훌쩍 떠나고 싶게 만드는 책.
그러니 어느 날 문득 인생에 노잼 시기가 찾아온다면,
그래서 혹시나 매일 밤 고민이 찾아오고, 생각들이 여기저기 엉켜 있다면 한 번 가볍게 읽어보시길.
그렇게 마음에 훅 박힌 한 구절을 들고, 또 훌쩍 여행을 떠나보시길 이야기해 본다.
한국에서의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낯선 곳에서 배고픈 학창 시절로 돌아갈 결심이 좀처럼 서지 않았다.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해 항아리 덫에 걸린 원숭이 같다.
…
그러다 보면 메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녀의 용기와 무심한 듯 그것을 나눠주는 넓은 마음에 대해. 그리고 일과 일상에 툴툴대면서도 항아리를 지키고 매달리려 하는 나를 생각한다. 지금부터 스물몇 해가 흐르고 내가 육십 대 후반이 되었을 때, 나는 그곳에 갈 수 있을까? 그것은 인위적인 계획이나 결심이라기보다 오히려 마음의 문제일지 모른다.
예를 들면 ‘알로하’ 같은 그리고 ‘메리’ 같은.
- 266p
표지출처: 사진: Unsplash의 Luke Stackpoo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