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디렉터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 상상력
브랜드 디렉터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리더십?, 창의성?, 실행력? 어느 하나도 빠질 수 없다. 하지만 요즘 들어 자주 생각나는 단어가 있다. 상상력이다. 상상력이라니, 너무 의외이지 않은가?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상상력은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보는 힘’이라고 한다. 브랜드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컨설팅을 오래 해왔어도 여러 브랜드를 직접 만들어보았어도 매번 낯설고 예상 밖의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디렉터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처음 겪는 일, 처음 마주하는 감각, 처음 내려야 하는 결정이 반복된다. 그래서 상상력이 필요하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브랜드의 형태와 결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힘 말이다.
브랜드 컨설팅만 해오다 2년에 걸쳐 ‘하우스오브신세계 헤리티지’라는 브랜드를 론칭했다. 공예를 바탕으로 기프트 숍, 전시, 워크숍 등을 경험할 수 있는 복합적인 브랜드다. 하나의 브랜드가 만들어지는 데 이렇게 많은 일이 얽혀 있을 줄은 몰랐다. 처음엔 흔들림 없는 브랜드 플랫폼과 디자인, 그 가치를 담은 공간과 제품이 있으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브랜드는 그렇게 간단히 완성되지 않는다. 수많은 일들이 동시에 방향도 없이 엉켜 돌아간다.
수많은 일이 동시에 굴러가기에 브랜드의 키를 지고 있는 브랜드 디렉터만 보게 된다. 브랜드를 지시하는 사람을 보고 론칭을 목표로 항해를 시작한다. 브랜드 플랫폼(브랜드 가치체계)이 설계되어 있어도 브랜드 디렉터가 결정자이기에 브랜드 플랫폼은 뒷전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디렉터가 있어 브랜드가 빠르게 구축되는 건 아니다. 디렉터 또한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배는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운다. 그래서 더더욱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 브랜드의 전체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말이다.
이 브랜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어떻게 고객들에게 접근하며 무엇을 필두로 고객과 소통하는지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상상을 구체적으로 하는 일이다. 실제 전시 기획자이자 공연 기획자, 브랜드 디렉터인 정구호 선생님은 툴을 사용하지 않고 머리로 브랜드의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를 전부 상상하고 글로 정리한다고 한다. 전시로 치면 어떤 티켓을 받고 어떻게 입장하며, 첫인상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어떤 동선으로 고객이 움직이고, 어떤 감정으로 빠져나가는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낸다. 그렇게 전체를 그린 뒤 필요한 사람들을 모으고 프로세스를 짜고 현실로 만들어낸다.
이미 시도된 디자인도 이대로 정말 괜찮은 것인지 미래를 생각하고 의심해보아야 한다. 앞으로 시도될 디자인은 당연히 미래를 상상하고 실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양쪽 모두에 항상 ‘배려’하는 마음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 사코 다쿠, 『삶을 읽는 사고』, 안그라픽스
하우스오브신세계 헤리티지 역시 그렇게 진행됐다. 브랜드 디렉터님이 상상한 브랜드의 모습을 토대로 각 팀은 하나씩 디테일을 쌓아갔다. 디렉터가 그려둔 이미지에 최대한 가까워지기 위해 모든 팀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움직였다. 물론 중간에 흔들리는 구간도 있었다. 하지만 큰 틀은 흔들리지 않았다. 세부적인 부분만 조율하며 전체의 방향을 유지한 채 프로젝트는 완성되어 갔다.
바로 발뮤다의 제품 기획 방식이죠, 테라오 겐은 시장 조사를 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드는 것보다 스스로 갖고 싶은 물건을 집요하게 상상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게 그의 신념이거든요.
- 김도영, 『브랜드로부터 배웁니다』, 위즈덤하우스
공간과 제품을 상상하며 디자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브랜드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 고객과의 접점에서 끊임없이 반응하고 인상을 남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의 이미지, 언어, 분위기까지 모든 접점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어야 비로소 고객은 브랜드를 경험하게 된다. 브랜드 디렉터는 단순한 아웃풋을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각 요소가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경험을 만들어내는지를 함께 그려야 한다. 상상은 결과 이전의 일이지만 동시에 경험 이후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브랜드 경험은 브랜드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어떤 톤 앤 매너로, 어떤 접점을 통해 고객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지 등을 통해 완성되지요. 그 때문에 저는 디자인이 반영된 결과물을 깨끗하게 촬영해서 정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촬영된 사진의 무드가 브랜드가 전하고자 하는 개성을 적절하게 드러내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 큐리, 『사람, 디자인, 브랜드』, 전채리 인터뷰 중, Class 101
요즘 브랜드에게는 ‘끊김 없는 경험’, 즉 seamless experience가 필수가 되었다. 이는 콘텐츠를 비롯한 경험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이어지며 고객에게 끊기지 않는 흐름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House of Shinsegae Heritage에서도 이러한 연속성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고객이 입구에 들어서기 전, 조대용 선생의 영상을 보고 그 앞에 놓인 발(簾)을 지나며 선생님의 스토리를 다시 떠올리고, 입구에 들어와 도슨트의 설명과 함께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며 작가들의 수고스러운 손길을 느끼는 것이다.
전시를 따라 걸은 후에는 자연스럽게 디저트 살롱으로 향하게 된다. 한국의 다과를 맛보고, 이어지는 동선에서는 공예 제품을 손에 쥐고 살펴볼 수 있도록 기프트숍이 연결된다.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리듬이 이어지는 구조, 이 모든 경험은 단절 없이 조용히 흐르도록 설계되었다.
물론 모든 방문자가 계획대로 움직이진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 공예와 문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요소를 조합하고 유기적으로 연결하고자 했다. CD님 역시 ‘손님을 맞이한다’는 관점에서 브랜드의 구석구석에 정성을 담았다. 어떻게 인사할 것인지, 어디에 설명이 들어가야 하는지, 어느 순간을 비워둘지 등 덜어내고, 더하며, 조용히 조율해 나갔다. 브랜드 디렉터는 손에 쥔 요소들만 바라보지 않는다. 고객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마음으로 브랜드를 마주할지 상상한다. 이 장면에선 어떤 경험이 좋을지, 저 공간에선 무엇이 남아야 할지. 보이지 않는 순간까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그려나간다.
흥분되는 첫 마음이 지나고 난 뒤에 콘텐츠를 지탱하는 힘은 타인에 대한 상상에서 온다. 수용자에게 어떤 첫인상으로 다가갈지, 그들은 어느 순간에 어떤 마음으로 이 콘텐츠를 선택할지, 보고 난 뒤에 무엇이 마음에 남을지 상상한 만큼 콘텐츠에 힘이 생긴다.
- 최혜진, 『Editorial Thinking』, 터틀넥프레스
이 글을 쓰며 혼자 생각했다. 만약 직사각형의 공간 안에 브랜드의 결을 담은 팝업스토어를 만든다면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디렉터가 되어본 적이 없어 선뜻 떠오르는 그림은 없었다. 다만 레퍼런스를 모으고, 무드보드를 만드는 방법론만이 막연히 남았다. 결국 상상에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많이 본 사람만이 그릴 수 있고 그중 무엇이 이 브랜드에 맞는지를 구분할 줄 아는 감각이 필요하다. 어느 매거진에서 조수용 발행인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일을 시작할 때 ‘나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좋아할 거야’라는 방식은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카페를 디자인한다면 내가 언제 카페가 좋았고, 어떤 기분이었으며, 어떤 메뉴판이 인상적이었는지를 되짚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결국 상상력을 위해 중요한 건 자신이 좋아했던 순간을 끝까지 따라가 구체화하고 단단하게 정리해 두는 일이다. 그렇게 쌓인 경험은 자신만의 ‘데이터 박스’가 된다. 브랜드 디렉터는 그 안에서 데이터를 꺼내어 상상하고 구체화한다. 상상하는 힘, 그것이 브랜드 디렉터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