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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사수를 위한 칸타타

사람 냄새나는 사수

by 쏘뇨

의지하던 사수가 곧 떠난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일했던 것 같다. 두 번째 회사였던 대행사 시절부터 현재 회사까지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수 없이 일했다. 누군가에게 묻고 배우기보다 부족한 부분은 스스로 채워야 했다. 모르면 찾아보고 다음 날엔 그걸 실무에 적용했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낯설었고, 책, 강의, 영상에 기대며 버텼다.



대기업에 들어온 뒤엔 더 큰 벽을 마주했다. 업무를 추진하는 방식과 조직의 시스템은 복잡했고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도, 참고할 만한 매뉴얼도 없었다. 서로 잘 모른다는 이유나 귀찮다는 이유로 도움 요청을 무시당하기 일수였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환경 속에서 낯선 흐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더디고 지치는 일이었다.



일과 시스템에 지쳐가던 시기 마침내 사수가 생겼다. 공채 출신으로 항상 긍정적이고 일도 똑부러지게 하는 사람. 시스템과 일에 능하면서도 주변을 잘 챙기고 자기만의 소소한 재미도 잘 나눌 수 있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 무렵 나는 말 그대로 흔들리는 사람이었다. “감각 하나하나에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규정할 수 없는 인상 하나하나에 고통스럽게 새로 태어난다. 나는 내 것이 아닌 인상들에 의지해 살아간다. 나는 포기를 일삼는 난봉꾼이고, 내가 나인 방식으로 타인이 된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이렇게 휘둘리고 지쳐갈 타이밍에 대단한 사수가 덜컥 생겼다. 그렇게 우거진 나무 아래 혼자 조용히 움츠렸던 몸을 펴고 다시 일의 리듬을 되찾아갔다.



I. 이왕이면 긍정적으로

사수가 오자 일이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수개월을 붙잡고만 있던 브랜드 스토리가 확정되고, 브랜드 플랫폼이 정리되더니, 브랜드 리플렛까지 무사히 완성됐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브랜드 티저 영상, 브랜드 통합본 영상, 작가별 영상까지 하나씩 차근히 지금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 팀은 브랜드 설계와 영상만 맡고 있는 게 아니다. 이름 붙이기 애매한 거의 모든 일을 맡는다. Press & VIP 행사 기획, 내부 소식지와 외부 매거진 대응, 인스타그램 운영과 어워드 출품까지 ‘브랜드’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모호한 일을 끝없이 처리하고 있다.



업무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바뀌는 와중에도 사수는 흔들림이 없었다. 수많은 일들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나누고 효율적인 방안을 찾아 일을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작고 사소한 일도 웃으며 해낼 수 있는 그런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Creative Director의 무리한 요청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실현 가능한 방향을 끝까지 찾아내 결국은 구현해내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오전까지는 보통의 하루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오후부터 비바람이 불기 시작됐다. Creative Director는 브랜드를 알리는 방식으로 일반적인 홍보 대신 여행 업계와 럭셔리 브랜드의 실무자들을 초대해 이벤트를 열자는 제안을 했다. 그들이 우리 브랜드를 직접 보고, 듣고, 느꼈을 때 브랜드의 진정성을 알아차릴 것이고 그 경험이 자연스럽게 협업으로 이어질 거라 믿었다.



흔한 방식은 아니었다. 보통은 인플루언서와 미디어를 초청해 노출을 만들고 커버리지를 늘리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특정 업계의 ‘일반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그 여운이 브랜드를 퍼뜨리는 기점이 되기를 바랐다. 당연히 일반 고객이 아닌 만큼 이번 행사는 인스타그램에 바이럴 되거나 어딘가에 노출될 일도 없었다. 우리가 준비한 것을 보고 좋은 인상을 받은 누군가가 조용히 연락을 해주기를 기다리는 일방향의 소통에 가까운 시도였다.



익숙하지 않은 방식에 머리가 따라가지 않으니 몸도 더뎌졌다. ‘이걸로 대체 어떤 커버리지를 만들 수 있지?’ 답답함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사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리한 요구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가능한 자원을 하나씩 모았다. 에이전시에 연락을 돌리고, 내부에서 업계 커넥션을 찾아내며 하나하나 실행 가능한 조각을 맞췄다. 다행히 행사는 큰 이슈없이 마무리 됐다.



다만 예상했던 대로 지금까지도 별다른 반응은 없다. 누구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고 커버리지 역시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많이 부를 수 있었다는 만족감과 잘 끝냈다는 안도감으로 사수는 기뻐했다.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만 시선이 가있는 사람,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스스로를 기꺼이 칭찬할 수 있는 그런 긍정적인 사람이다.


무엇이든 적당한 거리에서 숨 쉬듯 받아들이는 자세, ‘되는대로 즐겁게’ 해보려는 자세가 좋다.
숨 쉬듯 자연스럽다는 것.

- 박연준,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달



II. 다정하고 따뜻한

항상 눈을 살짝 찡그리며 웃는 사람. 작은 일에도 웃고 주변에 좋은 기운을 퍼뜨리는 사람. 사수는 그런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론칭을 앞두고 모두가 과도한 일에 지쳐 날이 서 있을 때도, 팀 전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때도, 그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공기를 환기시켰다. 사소한 이야기에도 진심으로 반응하고 힘든 와중에도 일상의 작은 기쁨을 나누던 사람이었다.


웃는 얼굴을 보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여유가 있다는 말이며 웃음을 짓는 일은 여유를 의식하는 일이다. 모두를 향한 감사, 평화를 생각하는 마음에 가깝다. 즐겁게 평온하게 해 가자. 서두르지 않아 된다고 말해주는 듯한, 말하는 듯한 행위다. 새삼스럽지만 ‘웃는 얼굴’은 참 좋다.

- 나가오카 겐메이, 『디자이너 마음으로 걷다』, 안그라픽스



사수는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다. 쓸데없는 말에도 귀 기울이며 근원을 찾는 공허한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는 인간적인 사람, 모두 자기 얘기만 하는 대환장 시대에서 남의 말을 들어주고 진심으로 답변하는 사람냄새가 나는 그런 사수였다. 수직적인 관계임에도 브랜딩에 대해 같이 생각하고 함께 방법을 만들어갔다 (전통 대기업에서는 상당히 어렵다).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될 일에도, 사수는 늘 조용히 짚어줬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는지 세세히 설명하며 더 나은 방향을 함께 찾았다. 공채 문화를 활용해 나 대신 먼저 메시지를 보내 일을 거들어주는 사람이자 수많은 일이 쏟아지는 가운데 팀장님이 시키지 않았음에도 손발 벗고 먼저 나서 일을 정리하는 사람이다. 누구보다도 먼저 우산이 되어주려 노력하고 부사수임에도 우리는 함께 일하는 사람이고 같이 헤쳐나가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사수이다.



그 옆에 있으면서 나도 그런 다정한 사수가 되고 싶다 몇 번이고 생각했다. 화내지 않고, 침착하게 같은 설명을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는 사람. 어려운 말을 쉽게 풀어 누구든 이해하게 만드는 사람 말이다. 그런데도 함께 고생하는 처지에서 나도 모르게 그에게 너무 의지하게 되는 순간들이 많았다. 큰 보고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부사수’라는 타이틀 뒤에 숨고, 그가 나서기를 기다리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더 주체적으로 나아가 그 사람의 일을 덜어줘야겠다 생각할 때쯤 사수의 휴직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아쉽다.



아직도 사수와의 첫날이 기억난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가을이 슬며시 다가오던 어느 날이었다. 처음 인사를 나눴을 때, 그는 한없이 밝은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이렇게 말했다. "전 사수를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쏘뇨 파트너의 사수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같이 잘 헤쳐나가요."



그 말이 이 회사에서는 꽤 생소하게 느껴졌다.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함께한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같이 지내보면서 더욱 잘 알겠다. 이 분은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란 것을.




유병욱 CD의 『생각의 기쁨』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인생은 결국, 어느 순간에 누구를 만나느냐다.” 힘든 시기에 좋은 사수를 만났고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서인지 사수가 휴직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에 시원섭섭한 마음이 동시에 든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알기에, 잠시 멈추고 쉬기로 했다는 결정은 다행이고 기쁘다.



한편으로는 이제 함께 일상을 나누지 못한다는 생각에 아쉽다. 같은 일로 대화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이번 휴직으로 회복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사수도 가족과의 평범한 일상 안에서 다시 기운을 얻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가볍고 환한 얼굴로 회사의 다른 팀으로 돌아오기를. 그렇게 꼭 됐으면 하다.


함께 낄낄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 때, 그곳은 숨 쉴 수 있는 장소가 된다. 그러니까 이런 밤은 소중하다. 우리가 공유했던 과거에 대해, 진전 없는 현재에 대해, 허약한 미래에 대해, 시답지 않은 농담을 곁들여 함께 낄낄대는 밤. 누구는 이별을 했고 누구는 승진을 했고 누구는 다이어트에 실패했다. 전염병과 끔찍한 상사와 빈약한 통장 잔고는 여전하다. 하찮고 자잘하기 그지없는 행복과 불행과 기쁨과 울분을 나눌 시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오늘의 할 일을 해치우고 에너지를 축적한다. 나라는 좁고 편협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낄낄의 힘에 기대 살아간다.

- 김지선, 『내밀 예찬』,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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