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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재소녀 May 15. 2019

미국 이민자 가정에서 배운 점

다르긴 다르다


미국 가정에서 두 달간 홈스테이를 했다. 흔히 생각하는 조기유학을 가서 미국 가정을 경험한 것은 아니고 대학생 때 지인의 가정집에서 두 달간 생활했다. 패밀리 프렌드(Family friend)라고 하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엄마 친구네 가족이다. 이들은 이민열풍이 불던 2000년대 초에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아주에 자리를 잡았다. 어린 시절 주말마다 같이 여행을 갈 정도로 친하게 지냈던 가족이라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려서 아쉬움이 컸었던 기억이 난다. 


이민을 간 후에도 국제전화로 근근이 연락을 주고받았었다. 약 10년간 얼굴 한번 보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 기억 하나로 꽤나 끈끈하게 인연을 이어갔다. 어학연수 겸 여행을 위해 애틀랜타에 가니 홈스테이를 해도 되겠느냐는 문의에 흔쾌히 방 한 칸을 내주었고 늦은 밤 공항 마중까지 나와주었다. 


이민은 처음 자리 잡아야 하는 1세대가 힘들고 2세대부터는 행복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특히 내 주변의 이민 가정은 대부분 나의 부모 세대가 1세대이기에 언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고충이 더 컸을 것이다. 그들은 자식의 밝은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을 오롯이 희생했다. 1세대의 애정과 희생을 기반으로 자란 2세대는 한국에서 성장한 나와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본 미국 이민자 가정의 자매에게서 배운 점 세 가지를 적어본다. 


내가 오는 날 냉장고에 쓰여있었다.


1. 자존감


자존감에 대한 개념이 나와 달랐다. 내가 생각했던 자존감은 나를 사랑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고백하자면 자존감의 의미만 알고 있었을 뿐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겪은 자매의 자존감은 견고했다. 두 명 모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애정과 '본인'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겠다는 의지, 다시 말해 '나'에서 시작하는 것들이 강했다. 지금까지 이뤄낸 것을 다 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했다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미국에서 창업자가 많이 나오는 것이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있어서라고 했던가. 그들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첫째 언니는 학부 때 음악과 심리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대학 졸업 후 간호 대학에 진학했다. 주기적으로 나갔던 병원 봉사활동을 통해 새로운 꿈을 찾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공부를 잘해서 전형적인 아시아계 이민자 가정처럼 모두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의사가 아닌 연구가 본인의 적성에 맞다고 판단했고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언어에 흥미를 느껴 독일어를 배우러 독일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그곳에서도 본인이 좋아하는 화학 연구를 지속했다. 장학생으로 뽑힌 것은 물론이거니와 뉴욕에서 진행되는 인턴 프로그램에도 선발되었다. 그리고 올해 5월 박사 과정을 마쳤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던 나는 주입식 교육의 순응자였다. 스스로 진취적으로 만들어가는 진로와 열린 교육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줄 알았기에 이 둘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내가 찾은 적성을 위해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고? 


한국과 미국 모두 타인의 시선과 기대를 외면한 채 내가 원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미국에서는 그게 옳다는 확신이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삶. 한국도 과거와는 다르게 '나'를 중시하는 문화가 강해지고 있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와 자신감. 그것의 시작은 내 존재와 자아에 대한 존중감, 자존감이다. 


이 자매의 삶을 접한 후에 자신감과 욕심이 생겼다. 나도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원하는 것을 찾고야 말겠다는 욕심. 내가 무엇을 공부하고 싶고 업으로 삼고 싶은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2. 존중받는 개인주의와 적절한 간섭
   

판사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이 유명해지면서 '개인주의'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도 익숙해졌다. 단일민족을 강조했던 한국 사회에서 개인주의가 존중받기 시작한 것은 나로서는 참 다행인 일이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개인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홈스테이를 하던 시절 나는 대학교 3학년이었다. 나이도 스물셋이라 성인이었으나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집에서 독립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집에서 나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통금을 정해주면 그것을 따르고 임용고시를 보라고 하면 임용고시를 봐야 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미국에서 생활해보니 자매 개개인은 모두 어른으로, 한 명의 개인으로 존중받고 있었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자존감과도 연결된다. 본인들의 자존감을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었고 가족들은 이를 존중해준다. 


'간섭'과 '조언'의 모호한 경계 아래 한국에서는 남의 삶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두 자매는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고 '자기 인생인데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의 마인드가 강했다. 다만 가족으로서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아끼지 않았다. 언니가 동생에게, 그리고 동생이 언니에게. 나이와 상관없었다. 삶의 영역에 따라 경험치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나이가 많다고 해서 꼭 조언을 하는 입장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 삶의 주인은 나다, 라는 단순한 명제를 실제로 목격한 시간이었다. 이들의 삶을 보고 나도 부모와 사회가 정해준 임용고시라는 진로를 버렸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항공 업계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라는 사람은 그대로이고 내가 생활하는 공간과 함께 지내는 사람들만 변화했을 뿐인데 나의 자아는 변화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나의 자아를 지키는 법을 배웠다. 



3. 가족 간의 토론 문화 


자매는 늘 토론을 했다. 일상 대화가 토론인 셈이었다. 사회 이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묻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한국에서는 '이 주제에 대해 토론하십시오'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일이 거의 없다. 대화를 하다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어도 '진지충'이라는 프레임 아래 토론하고자 하는 의지가 꺾이기도 한다. 반면에 이민자 2세대 자매는 늘 사회 이슈에 대해 고민하고 이것을 대화 주제로 올리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예를 들어 쇼핑을 하러 갈 때도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을 소비하는 것에 대해 토론한다. (패스트 패션 : 문자 그대로 빨리 바뀌는 패션으로 H&M, Forever21 등과 같은 브랜드 들이다. 환경오염과 노동 착취로 논란이 많다.) 현실적으로 저렴한 옷을 살 수밖에 없는 학생의 입장과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입장이 대립한다. 돈 없는 학생들이었기에 사회적 가치는 뒤편에 두고 세일 중인 옷을 구매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의미 없이 흘러갈 수 있었던 이동시간이 토론 시간으로 변화했다. 본인의 의견을 주장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 안건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시간이 있었다는 뜻이다. 적절한 근거 없이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말하는 것은 주장이 아닌 억지기 때문이다. 


이들 가정에 토론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2세대의 적극적인 태도에서 기인한다. 기본적으로 자매 관계가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맺어지는 상하 관계가 아니라 동등했다. 그래서 대화를 할 때 어느 한쪽이 눈치를 보지 않는다. 이는 부모와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객관적인 사안에 관해 대화를 할 때 부모 자식 관계일 지라도 적절한 근거를 요구했다. 물론 여느 가정처럼 부모님의 의견을 따라야만 하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항상 근거를 기반으로 대화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막내가 다음 학기에 학교 근처에서 월세를 내면서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집에서 통학을 해야 하는지 결정할 때도 논리적인 이유와 예상되는 결과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끔은 저렇게 까지 이야기할 일인가?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가족 간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방식 자체가 인상적이었다. 일상을 공유하는 시간은 가족의 애정과 유대감을 키우고 토론하는 시간은 자매의 논리적 사고 형성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자란 것이 이러한 특성을 가지게 된 유일한 이유라고는 할 수 없다. 한 가정의 고유한 문화, 그들이 보고 자란 세상 등 복합적인 요인들의 결과일 것이다. 다만 내가 이민자 가정에서 배운 점이라고 적은 이유는 그들이 미국에서 성장한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 또한 겪어 보지 못한 한국의 삶이지만 대중매체에서 보이는, 그리고 그들이 전해 들은 한국 교육을 받았더라면 이렇게 자라지 못했을 것이라 했다. 


가지 않은 길을 갔을 때의 결과는 아무도 모르기에 쉽게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은 함께하고 성장기는 다른 나라에서 보낸 그들의 삶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컸다. 타인과 구별되는 독립된 나의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태도를 배운 것만으로도 두 달간의 홈스테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 시기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틀랜타 올림픽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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