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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기 001: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를 다시 써봄.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자신의 상태를 돌아봐야 한다. 지금 기분이 어떤지, 최근 일들이 만족스러운지,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그런데 만약 당신이 행복한데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면, 그건 진짜 행복일까?
"인식할 수 없는 행복은 존재할까?" 이 질문은 언뜻 형용모순처럼 들린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지개"처럼. 하지만 이 질문을 진지하게 파고들다 보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의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란 무엇인가?
이 글은 그 질문에서 시작해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곳으로 나아간다. 행복을 찾아 헤매던 우리가, 결국 도착하게 되는 곳은 어쩌면 행복이 아닐 수도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를 떠올려보자. 그곳 사람들은 '소마'라는 약으로 언제든 행복해질 수 있다. 불안하면 소마, 우울하면 소마, 지루하면 소마. 약을 먹는 순간 모든 고민은 사라지고 평온함이 찾아온다. 그들은 이 상태를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진짜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뇌 과학적으로 보면, 소마는 완벽하게 작동한다. 세로토닌과 도파민이 분비되고, 뇌는 쾌감을 느낀다.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행복의 상태"다. 하지만 뭔가 찝찝하다. 왜일까?
행복은 단순히 뇌의 화학작용이 아니다. 거기엔 "나"라는 주체가 필요하다. "지금 나는 행복하다"고 스스로 인식하고, 그 상태를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 그것이 있어야 비로소 행복은 "나의 행복"이 된다.
의식 없는 쾌감은 그저 생리적 반응일 뿐이다. 기계가 전기 신호로 즐거움을 느낀다고 해서, 그걸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최근 유행하는 '5억 년 버튼' 사고실험을 생각해보자.
버튼을 누르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당신은 5억 년 동안 완전히 고립된 공간에 갇힌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5억 년을 보낸다. 하지만 그 시간이 끝나면, 그 기억은 완전히 지워지고 당신은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거액의 돈을 받는다.
당신은 이 버튼을 누를 것인가?
대부분은 거부한다. "5억 년이나 고통받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누군가는 반박한다. "기억이 지워지는데 뭐가 문제야? 5억 년의 고통은 사라지고, 현실의 나는 그냥 돈만 받는 거잖아?"
여기서 핵심 질문이 등장한다: 기억이 지워진 경험은 '나의 경험'인가?
5억 년 동안 고통받은 주체는 분명 "나"다. 하지만 그 기억이 사라진 지금의 나는, 그 경험을 "나의 것"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고통은 실제로 존재했던 걸까? 아니면 타인의 경험처럼 나와 무관한 걸까?
이 딜레마가 보여주는 것은 명확하다. 의식과 기억의 연속성이 없다면, 경험은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내가 행복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비로소 "나의 행복"이 된다.
꿈에서 느낀 행복이 진짜 행복인 이유도 여기 있다. 꿈속의 '나'가 행복을 느꼈고, 깨어난 내가 그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꿈에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은 명확하다. 인식할 수 없는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은 주체가 스스로 그 상태를 인식하고 평가할 때 비로소 성립한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생기듯, 의식이 있어야 행복도 존재할 수 있다.
의식된 행복의 배신 — 왜 행복은 무뎌지는가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답을 찾은 걸까? "의식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
당신이 오랫동안 바라던 승진을 했다고 상상해보자. 처음 며칠은 황홀하다. 새로운 직함, 높아진 연봉, 달라진 업무 범위. "나는 행복하다"고 확실히 의식한다.
그런데 3개월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직급은 이제 일상이 된다. 높아진 연봉도 새로운 기준선이 된다. 처음의 황홀함은 사라지고, 이제 다음 단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다음 승진은 언제지?" "저 사람은 나보다 더 높은 직급인데..."
이것이 헤도닉 트레드밀(hedonic treadmill)이다. 우리의 뇌는 어떤 행복에도 적응한다. 쾌락이 지속되면, 도파민 수용체는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한다. 러닝머신 위를 달리듯, 우리는 계속 달리지만 제자리다.
목표를 달성하면 행복해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도착한 순간, 행복은 이미 다음 지점으로 이동해 있다.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팀원들과 축배를 들고, 상사에게 칭찬받는다. 분명히 기분이 좋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묘한 공허함이 찾아온다.
"그래서 뭐?"
이 순간, 우리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우리가 진짜 원했던 것은 '행복의 지속'이 아니라 '의미'였다는 것.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은 사실 잘못된 질문이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다. 행복은 과정에서 잠깐 스쳐가는 부산물에 가깝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이 불편함은 내게 무엇을 말하는가?"
"이 과정에서 나는 무엇을 배우는가?"
행복을 추구하면 행복은 도망친다. 하지만 의미를 찾다 보면, 행복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역설적이게도, 그 답은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것에 있다.
마라톤을 뛰어본 사람들은 안다.
처음 10km는 괜찮다. 20km를 넘어서면 다리가 무겁다. 30km부터는 지옥이다. 근육은 비명을 지르고, 폐는 타들어간다. "왜 내가 이 짓을 하고 있지?" 그만두고 싶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갑자기 깊은 평온함이 찾아온다. 몸은 여전히 힘들지만, 의식은 묘하게 맑아진다. 세상이 선명해진다. 이것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다.
뇌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엔도르핀과 엔도카나비노이드가 분비되면서 고통이 쾌감으로 변환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생화학적 메커니즘이 아니다.
고통 없이는 이 경험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고통을 피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평온함. 불편함을 통과해야만 만날 수 있는 맑음. 이건 운동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어려운 프로젝트를 밤새 붙잡고 있을 때, 머리가 터질 것 같다가 갑자기 모든 게 연결되는 순간. 복잡한 문제를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 해답이 명확하게 보이는 순간. 어려운 대화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혔을 때, 오히려 관계가 깊어지는 순간.
이 모든 순간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통과했다는 것.
몰입(flow)이라고 부르는 고차원의 집중 상태도 마찬가지다. 능력의 한계에 도전할 때, 불편함과 긴장을 견뎌낼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 편안함 속에는 몰입이 없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운명을 사랑한다. (Amor fati)"
이건 체념이 아니다.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인다"가 아니라, "이것이 내 삶이므로 사랑한다"는 적극적 긍정이다.
니체에게 초인(Übermensch)은 고통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을 삶의 재료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는 묻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피할 수 있을까?" 대신 이렇게 묻는다. "이 고통은 나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고통은 벌이 아니라 훈련이다. 삶이 당신에게 부여한 과제다.
이때 행복은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고통의 의미화로 재정의된다. "왜 내가 이 고통을 겪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줄 수 있을 때, 고통은 더 이상 적이 아니라 동료가 된다.
회사에서 어려운 프로젝트를 맡았다. 밤샘 작업, 끝없는 수정, 팀원들과의 충돌. 힘들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는 더 나은 리더가 되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 고통은 견딜 만해진다. 아니, 견디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통해 성장한다.
AI 시대에 우리는 묻는다. "인간에게 남는 고유한 가치는 무엇인가?"
AI는 인간의 노동을 대신한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더 효율적으로. AI는 쾌락도 최적화한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당신이 원할 만한 추천, 당신이 편안해할 만한 환경.
하지만 AI는 한 가지를 할 수 없다. 상처를 의미로 바꾸는 것.
AI는 오류를 수정하지만, 의미를 재구성하지는 못한다. AI는 상처받지 않는다. 실패해도 아프지 않다. 그래서 AI는 고통을 통과하며 진화하는 경험을 할 수 없다.
고통을 의미화하는 능력. 이것이 AI 시대 인간의 마지막 자산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고통의 소멸이 아니다. 고통의 재해석이다. 불편함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듣는 것이다.
고통은 생존의 언어다. 변화를 신호한다. "여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라."
그 신호를 무시하고 쾌락만 추구하는 삶은,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것과 같다. 움직이지만 나아가지 않는다.
팀 회의에서 당신과 동료의 의견이 충돌했다.
동료는 A안을 주장하고, 당신은 B안이 맞다고 생각한다. 논의는 점점 날카로워진다. 분위기가 경직된다. 회의가 끝나고, 둘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남는다.
이제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 번째: 회피한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대충 넘어간다. 다음 회의에서는 그 동료를 피한다. 메신저로만 필요한 말만 주고받는다. 불편하지만, 충돌은 피했다. 평화롭다.
두 번째: 마주한다. 회의 후 그 동료에게 다가간다. "아까 회의에서 의견이 달랐는데, 네 생각을 좀 더 듣고 싶어. 내가 놓친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두 번째는 불편하다. 거절당할 수도 있다. 더 깊은 갈등으로 번질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진짜 문제는 의견 충돌이 아니라, 그것을 회피하면서 생기는 거리감이다.
첫 번째 선택은 편하다. 하지만 그 편안함의 대가는 관계의 얕음이다. 표면적으로 부드럽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나누지 않는 관계. 위기가 오면 쉽게 무너지는 관계.
두 번째 선택은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통과하면, 관계는 깊어진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 속에서도 함께 일할 수 있는 신뢰가 생긴다.
갈등은 관계가 깊어지기 위한 통과의례다. 회피하면 관계는 그 지점에 머문다. 마주하면 관계는 한 단계 진화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안전지대(comfort zone) 안에 머문다.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업무, 익숙한 루틴. 거기서는 불안하지 않다.
하지만 성장은 안전지대 밖에서만 일어난다.
어려운 대화를 먼저 시작해보자. 피드백을 요청해보자. "내가 이 프로젝트에서 부족했던 부분이 뭐라고 생각해?" 듣기 싫은 말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 속에 당신이 성장할 단서가 있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지원해보자. 해본 적 없는 일이라 불안하다.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불안 속에서 새로운 능력이 자란다.
질문을 바꿔보자. "어떻게 하면 편안할까?"가 아니라 "이 불편함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불편함은 신호다. "여기 주목하라." "여기서 배워라." "여기서 자라라."
의식하는 삶이란 결국 이것이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해석하는 습관.
오늘 당신을 불편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 불편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상사의 날카로운 피드백? → 내가 놓치고 있던 맹점을 보여준다.
팀원과의 의견 충돌? → 나와 다른 관점을 배울 기회다.
새로운 업무의 부담감? → 내 능력이 확장되는 순간이다.
불편함을 적으로 보지 말자. 불편함은 나를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데려가려는 삶의 초대장이다.
행복은 고통의 반대편이 아니다. 행복은 고통 너머에서 의식이 진화한 흔적이다.
진정한 행복은 고통을 없애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걷는 법을 배우는 순간에서 온다.
"인식할 수 없는 행복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여정을 거쳐, 전혀 다른 곳에 도착했다.
행복은 도착지가 아니었다. 행복은 의식하는 삶의 부산물이었다.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를 읽는 것. 불편함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는 것. 갈등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통해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것.
의식하는 삶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짜 삶이다.
니체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삶이 나를 부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