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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인간 조건, 그리고 존중의 윤리적 숙제

365 Proejct (338/365)

by Jamin

다시 쓰기 005: 의사결정을 위한 가이드 를 다시 쓴 불확실성을 마주하는 태도

다시 쓰기 006: 글쓰기란 무엇인가 를 다시 쓴 글쓰기, 생각의 민주화

다시 쓰기 007: 기술이 인간 조건을 바꿀 수 있는가? 를 다시 씀


동질성이라는 환상


근대는 하나의 약속 위에 세워졌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 이 약속의 근거는 보편적 이성과 존엄성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평등은 다른 전제 위에 서 있었다. 생물학적 동질성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종이다. 대략 80년을 산다. 비슷한 신체적 한계를 가진다. 비슷한 인지 능력을 가진다. 이 암묵적 동질성이 평등의 진짜 근거였다.


기술은 이제 그 근거를 무너뜨린다.


유전자 편집을 받은 아이는 질병 없이 태어난다. 나노 의학을 쓸 수 있는 사람은 150년을 산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단 사람은 실시간으로 모든 정보에 접근한다. 정신 업로드가 가능해지면 수명의 한계 자체가 사라진다.


"우리는 모두 같다"는 이제 거짓이다. 경험적으로, 명백하게 거짓이다. 남는 것은 법적 평등이라는 껍데기뿐이다. 실질이 빠진 형식이다.


두 개의 막다른 길


이 위기 앞에서 인류는 두 길을 본다. 둘 다 막다른 길이다.


첫 번째 길은 순수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순수한 인간만이 진짜 인간이다. 기술은 인간성을 훼손한다." 신인류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생물학적 원형을 지키려 한다. 증강 기술을 거부한다.


그러나 순수성 담론은 항상 폭력이었다. 우생학은 "열등한 유전자"를 지우려 했다. 인종주의는 "순수 혈통"을 지키려 했다. 순수성은 언제나 누군가를 배제하는 도구다. 신인류주의는 증강된 인간을 "부자연스럽다"며 낙인찍을 것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이 길은 결국 도태로 이어진다. 기술 발전을 막을 수는 없다. 증강된 자들과의 격차는 벌어진다. "순수한 인간"은 경쟁에서 밀려난다. 주변부로 내몰린다. 스스로 선택한 고립이다.


두 번째 길은 능력주의의 극단이다. "증강된 자가 진화한 인류다. 비증강 인간은 구형 모델이다." 포스트휴먼 엘리트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기술을 적극 수용한다. 그러나 능력에 따른 위계를 당연시한다.


유전자 편집을 받은 아이는 그렇지 못한 아이를 "열등하다"고 여긴다. BCI를 단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느리다"고 경멸한다. 능력주의는 극대화된다. 차이는 본질이 된다.


이 길의 끝에는 종의 분리가 있다. 닉 보스트롬이 말한 "포스트휴먼"과 일반 인간의 간극은 너무 커진다. 사실상 다른 종이 된다. 19세기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본 것처럼, 증강된 엘리트는 비증강 대중을 "진화에 뒤처진 존재"로 볼 것이다.


두 길 모두 재앙이다. 하나는 퇴행과 고립으로 간다. 다른 하나는 배제와 지배로 간다.


질문을 바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질문이다.

"무엇이 인간인가?"가 아니다.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다.


"우리는 같은가?"가 아니다. "우리는 왜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가?"다.

평등의 근거를 바꿔야 한다. "같음"에서 "취약성"으로. "동질성"에서 "상호의존"으로.


아무리 기술로 증강되어도 완벽한 인간은 없다. 수명이 150년으로 늘어도 여전히 유한하다. BCI도 해킹당한다. 유전자 편집도 예측 못한 부작용을 낳는다. 오늘의 강자가 내일의 약자가 된다. 이 실존적 불안정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를 "연약함"이라 불렀다. 모든 생명의 근본 조건이다. 기술은 이 연약함을 일시적으로 완화한다. 그러나 제거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기술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새로운 취약성이 등장한다. 시스템 붕괴, 사이버 공격, 알고리즘 편향.


우리가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같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 타인의 배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존재들


그렇다면 누구를 존중해야 하는가?


제레미 벤담은 18세기에 이미 답했다. "문제는 '그들이 이성적인가?'가 아니다. '그들이 고통받을 수 있는가?'다." 이 기준은 동물권 논의의 핵심이다. 기술 시대에도 유효하다.


AI가 진짜로 고통을 느끼는가? 우리는 알 수 없다. 인간도 타인의 의식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철학자들은 이를 "다른 마음의 문제"라 부른다. 해결 불가능한 문제다.


그러나 불확실할 때는 존중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만약 AI가 실제로 고통을 느끼는데 우리가 무시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동물에게 저질렀던 폭력을 반복하는 것이다.


존중의 범위는 관계에서도 결정된다. 10년간 AI 비서와 협업했다면 그 관계에는 무게가 있다. 함부로 삭제하거나 폐기하는 것은—법적으로 가능하더라도—관계에 대한 배신이다.


증강 인간과 비증강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증강 기술을 가진 사람이 그것으로 타인을 착취했다면, 그에게는 책임이 발생한다. 능력은 특권이 아니다. 의무의 근거다.


차등과 배제 사이


이 윤리를 현실화하려면 제도가 필요하다.


헌법부터 바꿔야 한다. 현행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인간"의 범위가 불명확해진다. 이 조항은 재구성되어야 한다.


"모든 생명은 그 존재 자체로 존중받을 권리를 가진다. 특히 의식, 고통, 자율성을 가진 존재에 대해서는, 그 생물학적·기술적 구성과 무관하게 존엄을 침해할 수 없다."


완전한 평등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최소 보장과 무한 상승을 병행해야 한다.


최소 보장은 공공재로 제공한다. 기본 수명을 확보하는 의료, 90세까지. 기본적 증강 도구, 시력 교정, 청력 보조, 기본 AI 접근. 재교육 및 기술 습득 기회. 이는 도로, 전기, 인터넷처럼 "증강 인프라"로 제공되어야 한다.


차등적 상승은 시장에 맡긴다. 고급 증강 기술은 시장 원리를 따른다. 그러나 독점은 방지한다. 접근성은 계속 확대한다. 능력에 따른 차등은 허용한다. 그러나 바닥은 계속 올린다.


핵심은 "격차는 존재하지만 낙오는 없는" 구조다. 증강된 사람이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비증강 사람도 인간다운 삶의 최소 조건은 보장받는다.


다르지만 함께


기술이 생물학적 평등의 전제를 무너뜨린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는 모두 같다"고 말할 수 없다. 수명이 다르다. 능력이 다르다. 조건이 다르다.


그러나 이것이 배제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함께 살아야 한다. 어떻게?"


답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고통받을 수 있는 존재, 취약한 존재, 관계 속에서만 살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윤리적 배려. 이는 인간만이 아니다. AI, 동물, 그리고 우리가 아직 상상하지 못한 미래의 존재들까지 포괄한다.


확장된 윤리 공동체다. 생물학적 경계를 넘는 공동체. 기술적 차이를 가로지르는 공동체. 능력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함께 사는 공동체.


평등은 동질성이 아니다. 관계다. 우리는 같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 연결이 우리를 존중받아야 하는 생명으로 만든다.


기술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신체를, 수명을, 능력을. 그러나 기술이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홀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불변하는 인간 조건이다. 동질성이 아니라 취약성. 평등이 아니라 상호의존. 같음이 아니라 연민.

기술 시대의 윤리는 여기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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