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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의 철폐, 혹은 모든 방을 거실로

365 Proejct (345/365)

by Ja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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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기 012: 닌텐도 스위치 2 발표를 보고 를 다시 씀


스위치 2가 설계하는 '네트워크화된 친밀감'


1. 거실이라는 성역


닌텐도의 혁신은 '거실'에서 시작했다. N64의 4인용 컨트롤러 포트. Wii 스포츠가 일으킨 거실 혁명. 스위치의 분리형 조이콘. 이 모든 것은 '같은 공간에 모여 함께 즐긴다'는 철학을 담았다.


이는 제품 전략이 아니라 신념이었다. 게임은 개인의 오락이 아니다. 함께 모여 웃음과 탄성을 나누는 사회적 의식이다. 이 철학이 닌텐도를 기술 스펙 경쟁에서 벗어나게 했다. 닌텐도는 경험을 설계했다.


하지만 이 철학에는 한계가 있었다. 멀리 사는 친구. 1인 가구의 방. 팬데믹 상황. 닌텐도식 '함께'의 경험을 구현하기 어려웠다.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이 말했다. "매체는 메시지다." 물리적 거실이라는 매체가 닌텐도 경험의 한계를 규정했다.


2. 첫 번째 균열

닌텐도는 스스로 이 한계를 인정했다. '에브리바디 1, 2 스위치'(2023)가 그 선언이었다.


이 게임의 진짜 혁신은 100명까지 지원한다는 규모가 아니었다. 핵심은 스위치의 내장 기능이 아닌, 각자의 스마트폰을 컨트롤러로 동원했다는 점이다. 스마트폰의 마이크와 카메라를 이용했다. 참여 장벽을 낮추려 했다. 거실의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는 모순을 드러냈다. 플랫폼 외부의 기기에 의존하는 순간, 닌텐도가 중시하는 '마찰 없는 경험'이 깨진다. 사용자는 QR 코드를 스캔해야 한다. 웹 브라우저에서 권한을 허용해야 한다. 도널드 노먼(Donald Norman)이 강조한 "사용자의 인지적 부담 최소화" 원칙과 충돌한다.


'에브리바디 1, 2 스위치'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닌텐도의 사회적 철학을 네트워크 공간으로 확장하려면, 하드웨어 자체가 바뀌어야 하지 않는가?


3. 새로운 패러다임


닌텐도는 이제 하드웨어로 응답하려 한다. 닌텐도 스위치 2(가칭, 이하 스위치 2)는 거실을 넘어선다. 닌텐도의 사회적 철학을 네트워크 공간으로 확장하는 첫 번째 아키텍처가 될 것이다.


이 전환의 중심에는 내장 마이크와 카메라가 있다. 가설이지만, 이는 단순한 기능 추가가 아니다.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가 『수렴 문화』에서 설명한 "참여 문화"를 하드웨어 차원에서 구현하는 시도다.


기존 게임 플랫폼들과 닌텐도의 차이를 보자. PC나 타 콘솔에서는 게임을 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 툴을 설정한다. Discord를 설치한다. 서버에 접속한다. 채널을 생성한다. PlayStation은 파티 채팅을 만든다. Xbox는 음성 채팅을 켠다. 연결은 선택이다. 상호작용 마찰이 존재한다. 이는 소통을 위한 도구다.


닌텐도의 제안은 다르다. 게임에 접속하는 것이 곧 함께 있는 것이다. 친구의 '동물의 숲' 섬에 들어가는 순간, 서로의 목소리가 들린다. 마리오 카트 로비에 입장하는 순간, 10명의 얼굴이 화면에 뜬다. 연결은 설정이 아니라 기본값이다. 이는 함께 있음을 위한 놀이 그 자체다.


이 '마찰 제로' 설계는 제임스 J. 깁슨(J. J. Gibson)의 어포던스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존 거실이 제공하던 사회적 어포던스가 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다"는 행동 잠재성. 네트워크 인터페이스가 이를 그대로 구현한다.


이는 개발자들의 전제를 바꾼다. "유저가 음성 채팅을 쓸까?"라는 불확실한 가정이 아니다. "모든 유저가 목소리와 표정을 공유하는 상태에서 어떤 게임을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이 된다.


4. 거실 너머의 게임성

내장 마이크와 카메라는 거실 너머의 게임성을 정의한다. 이는 세 가지 방향으로 구체화된다.


첫째, 상시적 현존감 기반의 게임성이다. '동물의 숲'이 8명에서 12명 동시 접속을 지원한다는 가설을 생각해보자. 12명은 MMORPG의 공격대처럼 '무언가를 함께' 하기 위한 숫자가 아니다. 12명이 느슨하게 연결된 채 각자의 플레이를 즐긴다. 상시적 현존감을 위한 설계다.


미라 안드라데(Mira Andrada)가 SNS 연구에서 제시한 "주변적 친밀감" 개념과 일치한다. "항상 함께 하지 않아도, 함께 있음을 느낀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이 텍스트와 이미지로 구현하려 한 것을, 닌텐도는 놀이 공간으로 구현한다.


내장 마이크가 '눌러서 말하기'가 아니라 VRChat처럼 '가까이 가면 들리는' 공간 음향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어떨까? 친구의 섬에 방문했을 때, 특정 구역에서 들려오는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를 듣는다.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낚시터에서 한 친구가 "여기 좋은데!"라고 외친다.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박물관에서는 두 친구가 조용히 대화하는 속삭임이 들린다.


이는 계획된 접속이 아니다. 우연한 만남과 방문의 경험이다.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가 말한 일상 공간의 전유가 디지털 공간에서 실현된다. 주어진 공간을 사용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미화하는 행위다.

둘째, 수행과 반응 중심의 게임성이다. '에브리바디 1, 2 스위치'는 스마트폰이라는 보조 장치에 의존했다. 스위치 2는 그 자체가 마이크이자 카메라다. 수행과 반응을 핵심 컨트롤로 삼는 새로운 장르가 가능하다.


에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은 『일상생활의 자아 연출』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연출한다고 설명했다. 게임이 플레이어의 얼굴과 목소리를 인터페이스로 삼는다는 것은, 이 사회적 퍼포먼스를 게임 메커니즘의 일부로 통합하는 것이다.


표정 인식 퀴즈를 생각해보자. 카메라가 플레이어의 표정을 읽어 정답을 맞힌다. 기쁨, 슬픔, 놀람. "슬픈 척하지 말고 진짜 슬픈 표정을 지어봐!" 보컬 퍼즐도 가능하다. 목소리의 톤을 조절해야만 통과할 수 있다. 높게, 낮게, 속삭이듯. 웃음 참기 챌린지도 있다. 10명의 얼굴이 화면에 뜬다. 가장 먼저 웃는 사람이 탈락한다. 카메라가 인식한다. 승자는 끝까지 무표정을 유지한 사람이다.


이는 단순한 미니게임이 아니다. 제인 매코니걸(Jane McGonigal)이 『현실은 게임이 아니다』에서 주장한 것처럼, 게임은 현실의 사회적 한계를 재구성한다. 닌텐도는 얼굴 보고 말하는 친밀함이 사라진 디지털 시대에, 그것을 오히려 게임의 핵심으로 되살린다.


셋째, 대규모의 친밀함을 위한 게임성이다. '마리오 카트 월드'가 10명 이상의 멀티플레이를 지원한다는 가설을 보자. 핵심은 10명이라는 규모가 아니다. 10명이 만들어내는 친밀감이다.


기존 멀티플레이 게임들의 한계는 명확했다. Call of Duty의 보이스챗은 전술적 의사소통에 최적화되어 있다. Fortnite의 이모티콘은 감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뿐이다. 하워드 라인골드(Howard Rheingold)가 『가상 공동체』에서 지적했듯, 온라인 커뮤니티는 진짜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게임은 그 잠재력을 놓친다.


닌텐도의 제안은 이렇다. 단순한 레이스가 아니라, 레이스 전후의 소셜 로비가 게임의 본체가 된다.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 10명이 로비에서 대기한다. 각자의 얼굴이 아바타 옆에 작은 화면으로 표시된다. 누군가 "이번엔 진짜 이긴다!"고 외친다. 다른 이들이 웃으며 "너 항상 그렇게 말하잖아"라고 응수한다. 레이스 중 1위로 질주하는 당신의 화면에, 뒤처진 친구들의 "아 진짜!", "이게 말이 돼?" 같은 실시간 탄식이 들려온다. 결승선을 통과한 후, 당신의 환호성과 함께 친구들의 진짜 탄식, 진짜 축하, 진짜 격려가 쏟아진다.


이것이 닌텐도가 제안하는 대규모의 친밀함이다. 피에르 레비(Pierre Lévy)가 말한 집단 지성의 게임적 변주다. 10명은 단지 경쟁하지 않는다. 함께 감정의 아카이브를 실시간으로 구축한다.


이는 기존의 채팅 이모티콘이나 사전 녹음된 음성과 비교할 수 없다. 차원이 다른 사회적 보상이다. 당신이 이긴 것은 단지 레이스가 아니다. 친구들의 진짜 반응이다. 그것은 다음 번 게임을 하고 싶게 만드는 강한 동기가 된다.


5. 네트워크화된 친밀감

닌텐도의 시도를 더 넓은 맥락에서 보자.


셜리 터클(Sherry Turkle)은 『외로운 군중 속에서』에서 디지털 네트워크가 "연결 속의 고립"이라는 모순을 낳는다고 경고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진짜 함께 있음은 사라진다.


다나 보이드(Danah Boyd)는 『네트워크화된 공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것이 단순한 퇴행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이라고 주장했다. 개인의 사적 공간과 공적 참여의 경계가 흐려진다. 네트워크화된 사회성이라는 새로운 관계 양식이 등장한다.


닌텐도의 '모든 방을 거실로'라는 개념은 이 네트워크화된 사회성을 놀이로 번역한다. 터클의 우려에 대한 응답이다. 보이드의 통찰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시도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것이 생성형 AI 혁명과 정반대 방향을 향한다는 것이다. ChatGPT, Claude 등 AI는 NPC와의 완벽한 대화를 가능케 한다. 게임 내러티브의 미래를 재정의한다. 하지만 닌텐도는 묻는다. "왜 AI와 대화해야 하는가? 진짜 사람과 놀면 되잖아?"


이는 닌텐도다운 역발상이다. 기술적 첨단성이 아니라, 함께 있음이라는 원초적인 인간 욕구에 집중한다.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으로 보면, 닌텐도는 하드웨어와 인간을 단순히 연결하지 않는다. 하드웨어 자체를 사회적 관계의 행위자로 만든다. 마이크는 단순한 입력 장치가 아니다. 친밀감을 매개하는 사회적 존재가 된다.


6. 결론

닌텐도는 거실을 버리지 않는다. 네트워크 기술을 통해 모든 개인의 방을 하나의 거실로 묶어낸다.


스위치 2가 제안하는 것은 PC의 효율적 커뮤니케이션이나 PlayStation의 몰입적 싱글플레이를 대체하지 않는다. 완전히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디지털 시대에 함께 있음이란 무엇인가?"


닌텐도의 답은 이렇다. 함께 있음은 설정이 아니라 기본값이어야 한다. 함께 있음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놀이여야 한다. 함께 있음은 추상적 연결이 아니라 구체적 표정과 목소리를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 함께 있음은 소수의 깊이와 다수의 친밀함을 동시에 가능케 해야 한다.


이는 기술 스펙으로 경쟁하는 다른 플랫폼들과 다른 지향점이다. 닌텐도의 경쟁자는 Xbox도, PlayStation도, PC도 아니다. 진짜 경쟁자는 스마트폰 속 고립이며, 소셜 미디어의 얕은 연결이며, 디지털 시대의 외로움 그 자체다.


닌텐도가 증명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기술이 관계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은 숙명이 아니다. 올바른 설계 철학이 있다면 기술은 관계를 더 깊고, 더 넓고, 더 인간적으로 만든다.


철학이 하드웨어를 이끈다. 그 하드웨어가 다시 게임성을 정의한다. 닌텐도가 단순한 기술 패러다임이 아닌 경험의 철학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스위치 2가 성공한다면, 그것은 테라플롭스나 4K 해상도 때문이 아닐 것이다. 2025년의 우리에게 거실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다시 정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거실은, 이제 네트워크로 연결된 모든 개인의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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