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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중과 상연, 그 악연의 연대기

왜 자기들 마음대로 사람 바보로 만드냐고요

by MITCH


<은중과 상연>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평생의 관계 폭력을 낭만화한 드라마다. 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비교, 열등감, 질투, 상처가 성인이 되어서도 반복되고, 그것도 15화 내내 질질 끌면서 재현된다. 두 사람이 진짜 친구였던 순간은 거의 보여주지 않고, 열등감을 기반으로 한 갈등과 감정 소모만 이어진다. 15화 내내 반복할 필요가 있었을까? 2시간짜리 영화로도 충분했을 이야기다. '상연'은 자기 연민으로 무장한 채 평생 "나 힘들다"라는 말만 반복하고 '은중'은 그걸 끝까지 들어주는 청중으로 남는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우정이나 사랑의 연대기라기보다 악연의 연대기에 가깝다. 그 둘은 악연이다.



'상연'은 철저히 자기 연민으로 살아가며 스스로를 심연에 가두고, 누가 다가오면 내치고 다시 불러들이는 패턴을 끝없이 반복한다. 상처받은 자신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타인의 반응으로 존재를 확인한다. 죽음을 앞두고도 그 패턴은 바뀌지 않는다. '은중'이 놀라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안도한다. 죽음 앞에서도 마지막까지 자기만의 감정을 '은중'에게 쏟아붓는다. 편지를 읽히고, 울고, 필요하면 쉽게 꿇던 무릎도 꿇고, 아프다 소리 질러가며 자기감정 전시한다. '상연'의 마지막 선택은 '은중'의 기억 속에 남도록 흔적을 각인시키려는 행위처럼 보인다. 결국 이 드라마의 해법은 사과나 화해가 아닌, 또 다른 폭력이었다.



'은중'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공범이다. '상연'에게 상처받고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그녀를 이해하려 애쓰고 용서하려 애쓴다. "누가 널 끝내 받아주겠니"라고 말했으면서 결국 그 역할을 스스로 맡는다. '은중'의 선택들은 성장이라기보다 자기 파괴적 순응에 가깝다. 그렇게 해서라도 관계를 마무리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결국 '은중'은 정말로 '상연' 없는 삶을 논할 수 없게 됐다.



두 명의 '상학'은 극명하게 비교된다. '김상학'은 두 사람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지만 문제 해결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 오만하게도 오지랖은 넓지만 결정적 순간마다 책임 있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치명적 매력도, 압도적 존재감도 없다. 매력이 충분히 표현된, 서사도 존재하는 '천상학'에 비하면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이름 하나로 그렇게까지 얽히는 서사는 납득이 어렵다.



드라마는 스위스 안락사를 지나치게 이상화한다. 마치 그 선택이 가장 완벽한 죽음인 것처럼 보여준다. 현실에서 그 선택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죽음은 덜 존엄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섬세하게 다루어야 할 부분을 죽음의 윤리적 고민보다 '상연'의 감정 서사를 마무리하기 위한 장치로만 썼다. 비슷한 주제를 다룬 영화 <룸 넥스트 도어>를 보면 문제는 더 선명해진다. 그 영화는 죽음을 앞둔 두 친구의 대화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과거의 잘잘못을 끝없이 늘어놓기보다는 현재 순간의 감정을 정리하고 침묵과 시선으로 여백을 남긴다. 관객은 그 여백 속에서 많은 감정들이 느낀다. <은중과 상연>은 그와는 달리 과도한 회상, 오열, 설명으로 감정을 강요하고 시청자가 스스로 느낄 기회를 차단한다.



배우들의 연기만큼은 매우 훌륭하다. '은중'과 '상연'의 감정은 리얼하게 표현되고, 이 드라마에서 오직 연기만이 설득력을 갖는다. 덕분에 끝까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연기로 설득할 수 있는 서사의 한계는 명확하다. 마지막 회가 끝나면 남는 것은 감동이나 여운이 아니라 피로와 허탈함이다. 드라마는 끝까지 '상연'에게 심취해 있고 그녀 중심의 서사 속에 '은중'을 던져놓은 채 마무리된다. 끝까지 '은중'에게 과하다. '은중'이 신입생 시절 술자리에서 외친 말이 생각난다. "왜 자기들 마음대로 사람 바보로 만드냐고요"




+ 이 드라마도 시대 무드를 위한 소품 사용이 허술하다. 분위기만 내면 되는 걸까. 시대별 체크리스트를 강박적으로 나열한 듯 작위적이다.

+ '은중'이 최종적으로 작가가 된 이유가 있기를 바란다. 작가는 자기 삶의 모든 이야기를 글로 쓰는 저주가 있으니 그 저주를 이용해서 '상연'과 상관없이 부자가 되길 바란다. 그렇게 하면 끝까지 선심 쓰는 척하던 '상연'을 끝내 볼 품 없는 나쁜 년으로 남길 수 있을 테니. 그것이 '은중'에게 해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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