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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May 18. 2018

#23 봄에, 여기 여수를 걷다 보니 말야.

도망이 힘들면, 여행이라고 해 보는 거야.

 연정과 계절은 기척 없이 다가오기 마련이라,
눈치챌 때쯤이면 이미 걷잡을 수 없게 돼.


 겨우내 매달린 원고를 마치고 집 근처 개천가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던 늦은 오후 풍경이 그랬습니다. 나란히 늘어선 벚나무들이 연신 떨어내는 분홍색 조각들과 그 뒤로 펴 발라진 아이의 상기된 뺨 빛 같은 하늘, 한숨처럼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이미 무르익은 봄이 비쳤거든요. 저는 여전히 겨울용 카디건 차림이었는데 말이죠. 

 초점 없는 눈으로 건너편 세상을 바라보는데 문득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모두 털어낸 날이 떠올랐습니다. 열한 개의 계절이 지난 후에야 흩날리는 벚꽃잎을 보며 ‘이제 누구도 그립지 않아.’라고 혼잣말을 했던 순간이. 후련하기보단 울적했던 기분도 다시 입 안에 까끌하게 맴돌았습니다. 어쩌면 제게 무언가를 쓰는 것은 곧 그것을 그리워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당장 내일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었는데, 곧 변덕이 도져 어디라도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발이 아프도록 걷고, 목이 쉴 만큼 떠들 수 있는 곳으로. 다음 날 아침 속옷과 양말 하나씩을 챙겼습니다. 없어도 괜찮았지만, 떠나는 기분을 내 보려고요. 


바다를 보러 가자. 낮과 밤 그리고 아침까지, 가능하면 돌아오기 직전까지 어디서나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서울역에서 출발한 지 세 시간, 기차가 여수에 도착했습니다. 허름한 모텔에서 쪽잠을 잔 세 시간을 빼면 기대했던 대로 일박 이일 내내 걸었고, 혼자 참 많이 떠들었습니다. 그리고 고맙게도 어디를 가던 바다가 있었습니다. 내내 지근거리에서 시시각각 다양한 표정과 기분 좋은 백색소음으로 푸념들을 듣거나 가려준 여수 바다 덕분에 저는 2018년 봄을 괜찮게 보낼 수 있게 됐습니다. 


 여수 엑스포역을 나서자마자 항구가 보였고, 한달음에 달려가 난간에 기댄 채 한 숨을 크게 쉬었습니다. 미세먼지 핑계로 매일 실내 스스로를 가뒀던 이에게 마음 놓고 마시고 뱉은 그 숨은 ‘이대로 됐다.’는 말이 나올 만큼 상쾌했어요. 해안선을 따라 걷는 길은 콘크리트 바닥이 이렇게 폭신한 적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즐겁더군요. 

 저 멀리 으리으리하게 솟은 호텔 건물이 조금씩 크고 가까워지다 마침내 등 뒤로 스쳐갈 즈음, 왼편으로 곧게 뻗은 길이 보였습니다.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콘크리트 도로에는 그 사이를 왕복하는 작은 버스가 있을 정도니 길다면 긴 길이지만, 걸음이 고팠던 터라 마냥 반갑기만 했어요. 



걸어서 닿을 수 있는 섬

 바다가 보이는 길을 따라 오동도에 들어서고 휴일 인파를 따라 섬 안의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나무로 만든 계단, 발자국으로 생긴 길, 콘크리트로 빚은 전망대가 번갈아 이어지는 섬은 생각보다 컸던 터라 곧 다리가 뻐근해지더군요. 그래도 기암과 해안선이 보는 장소에 따라 완전히 다른 풍경을 선사하는 매력 때문에 산책로 사이로 난 계단을 발견할 때면 여지없이 신이 났습니다. 


 수풀이 하늘을 가려 어둑어둑한 길에서 동백꽃을 가로등 삼아 걷다가, 틈새로 바다가 보이면 곧장 내려가 바위에서 바다 그리고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여수에 도착한 지 세 시간 남짓, 이미 전날의 헛헛함은 대부분 사그라들었습니다. 걷기만 해도 즐거워지는 태평한 팔자를 타고난 것에 감사해야 할까요?



온 길을 돌아보며

 돌산 공원은 여수 바다를 가장 근사하게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수 밤바다’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 중 상당수는 돌산대교 주변으로 해안선과 능선, 그리고 작은 섬 장군도가 한 번에 보이는 돌산 공원 전망대의 프레임이더군요. 케이블카를 타는 대신 낡은 동네 골목길과 시장을 가로질러 걷느라 해가 거의 다 진 후에야 돌산 공원에 오르니 오후의 포근함 대신 쌀쌀맞은 강풍이 저를 맞았습니다. 그래도 붉은 노을이, 새까만 밤에 빠져 열 시가 다 되어서야 공원을 내려왔습니다. 그날의 야경을 저 역시 ‘여수 밤바다’라는 제목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요. 


 늦은 오후, 전망대 위에서 난간 너머 오동도와 그 주변 바다를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제가 있던 길을요. 걸어오며 했던 생각들과 섬 구석구석 버리고 온 미련들이 생생합니다. 저보다 몇 발짝 앞서 걷던 연인들은 걸어오며 나눴던 대화를 그새 복기하고 있습니다. 

 한창 사랑에 빠져있을 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는 건 지난밤에 나눈 대화들을 다시 읽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지난 메시지들을 들춰 보았고요. 시간이 지나며 그 횟수가 줄고 어제 나눈 대화들도 기억하지 못하게 됐을 때, 꼭 그때쯤 사랑도 끝났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니 알 것 같습니다.



여수, 밤, 바다.

 돌산 공원은 여수 바다를 가장 근사하게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수 밤바다’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 중 상당수는 돌산대교 주변으로 해안선과 능선, 그리고 작은 섬 장군도가 한 번에 보이는 돌산 공원 전망대의 프레임이더군요. 케이블카를 타는 대신 낡은 동네 골목길과 시장을 가로질러 걷느라 해가 거의 다 진 후에야 돌산 공원에 오르니 오후의 포근함 대신 쌀쌀맞은 강풍이 저를 맞았습니다. 그래도 붉은 노을이, 새까만 밤에 빠져 열 시가 다 되어서야 공원을 내려왔습니다. 그날의 야경을 저 역시 ‘여수 밤바다’라는 제목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요. 


 공원은 그날 제가 할 수 있는, 여수 바다와 가장 멀리 떨어지는 방법이었습니다. 바라보는 거리에 따라 풍경은 완전히 다르게 보여서 몹시 소란스럽기도, 한 없이 고요하기도 합니다. 오동도 전망대에서 본 바다는 사나웠지만, 돌산 공원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미동도 없이 평온했습니다. 파도가 수평선으로 보일 정도의 거리만큼 떨어져서 다시 한번 괜찮다고 혼잣말을 했고, 곧이어 떠나오길 잘했다는 말을 보탰습니다. 출렁이던 제 일상에서 말이죠. 



한 번뿐인 아침

 2만 원짜리 허름한 모텔방에서 짐을 꾸려 나선 것은 네 시가 되기 몇 분 전, 그리고 네 시 반에 버스를 탔습니다. 돌산도로 가는 첫 차에는 일찌감치 하루를 시작한 사람 대여섯이 있었습니다. 여수에 와 있다는 말에 지인은 향일암을 추천했고, 일출 명소라는 수식어에 반해 새벽잠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세 시간의 쪽잠마저 깨고 잠들기를 반복하느라 뜬눈으로 보내다시피 하게 만든 이 말은 여행에서만 효력을 발휘하는 일종의 주문입니다.  


 돌산도의 끝자락에 있는 버스의 종점,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오르막 길을 걸어 향일암 관음사에 도착했을 때 이제 막 수평선 주변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땀으로 흠뻑 젖은 티셔츠가 다 마르기도 전에 해는 한 뼘 가까이 떠올랐고요. 때마침 구름이 수평선을 가려 기대했던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차가운 새벽 공기와 새것인 것만 같은 햇살, 무엇보다 새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꽉 찬 고요 덕에 충분히 특별한 아침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상의 하루 역시 오늘과 다를 게 없을 텐데 낯선 곳에 와서야 게으름이 사라질까 싶습니다. 돌아가면 ‘일상 여행’이라는 간지러운 말로 매일 ‘지금이 아니면’이라고 주문을 외워볼까 생각했지만, 향일암을 내려가기도 전에 쉬지 않고 하품 쩍쩍하는 것을 보니 살던 대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주 간단히 행복해지는 법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쉽게 행복해지는 방법’ 중 하나는 근사한 카페의 아침 첫 손님이 되어보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하루에서 가장 반가운 인사를 받을 수 있고, 정성껏 내린 커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깨끗하게 정돈된 실내에 자리를 잡으면, 남아있는 한기 덕분에 상쾌함이 느껴지고요. 


 여수 구 항구 뒤편에 있는 바다가 보이는 마을 고소동/중앙동은 색색으로 칠한 벽과 지붕, 벽화들로 관광객에게 사랑받는 곳입니다. 화창한 아침 빛 아래서 바다와 함께 보이는 색색의 지붕들은 외국의 멋진 항구 도시 못지않게 아름답죠. 아침 열 시, 고소동에서도 높이 솟은 카페를 찾았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옥상으로 유명한 카페는 ‘낭만’이란 간질간질한 이름까지 붙어 처음 이 도시를 찾는 이를 설레게 했습니다. 


 테이블과 소파로 채워진 옥상에서 비엔나커피 한 잔을 두고 나 홀로 여유를 즐기던 것도 잠시, 곧 잠이 들었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여수의 낭만을 즐기러 온 사람들로 옥상이 제법 북적였어요. 어느새 점심때가 가까운 시각, 몇 모금 못 마시고 뭉그러진 커피가 아쉬웠지만 오늘의 첫 손님이 된 것만으로 그 값은 톡톡히 했습니다. 



오래된 항구

 저녁 여덟 시 반 서울로 출발하는 KTX 티켓을 예매하고 바닷가의 벤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첫 여수행의 욕심에 잠까지 줄여가며 이곳저곳을 다니느라 정신없이 만 하루를 보낸 후에야 떠나 온 이유가 생각났거든요. 긴 이야기를 끝맺은 직후, 꼭 누군가를 떠나보낸 것 같아 먹먹했던 그때 간절했던 시간이. 

 오후 다섯 시부터 일곱 시 반까지 지금은 해양공원이 된 옛 항구 한켠에서 해가 저물 때까지 배가 들고 나는 것을 가만히 보았습니다. 파랑과 주황, 그리고 짙은 남색으로 하늘이 그 빛을 바꾸는 동안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 보통의 날과 다른 점이었죠. 사실 그동안의 몇몇 여행에서 이런저런 것들에 빠져 떠나올 때 짊어진 것들을 도로 들고 온 적이 왕왕 있었는데, 늦게나마 떠올라 다행이었습니다. 

 그 시간이 너무 달콤해서 자칫 저녁을 거를 뻔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남도 여행인데 굶고 돌아갈 수 없어 근처에 유명한 바게트 샌드위치를 사들고 기차를 탔어요. 남도의 만찬은 아니었지만, 그 인심 못지않게 후한 여수 바다의 여유 덕에 든든한 귀갓길이었어요. 


 여수에는 제가 그토록 갈구했던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래서 아무리 짧아도 여행을 다녀올 필요가 있는 것이겠죠. 아니, 어쩌면 짧지만 그만큼 진한 여행이 때로는 더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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