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디뎌진 것만이 현실이다.
아 나도
10km 마라톤에
참여해볼까
시작은 늘 그렇듯 전두엽을 스치는 단상이었다. 삶에 새로운 일을 넣고 싶은데, 마땅히 뭘 넣는게 좋을 지 모르겠어, 자주 봤던 자기계발의 주제 ‘마라톤’을 떠올렸다.
당근마켓에서 런닝 동호회를 찾았다. 바로 일정을 잡고 며칠 후 모임 장소로 향했다.
운동장 근처로 가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쭈뼛쭈뼛 어색한 자세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가볍게 몸풀기 운동을 했다. 쩍벌하여 몸을 숙이는 자세는 어쩐지 어색했지만,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진리를 적당히 깨달은 20대 후반이기에 열심히 꺾어댔다.
페이스는 500대부터 650-700, 그리고 700 이후까지 있었다. 평소 달리는 경험 자체는 있었기에 이왕이면 제대로 달리고 싶었다. 650대 그룹으로 들어갔다.
호기롭게 달리기를 시작했다. 한 바퀴를 돌자 오른쪽 옆구리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1시간 전에 닭갈비에 순두부를 먹고, 고구마빵에 크림치즈와 블루베리 잼을 발라먹은 것이 화근인 듯 했다. 오른쪽 옆구리 통증만 없어도 나름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찼다. 문득 ‘내가 무언가를 참는 능력을 최근에 뽐낸 적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먼치서 달리는 러너들이 보였다. 더 빠른 페이스의 그룹이었다. 그들은 내가 머리속에서 동경하는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탄탄한 몸을 가지고 싶다면 저정도를 뛰어야 하는 구나..’ 잠깐의 현자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5분도 안되어 겸손해진 시간이었다.
딱 5바퀴 돌았을 때, 계획대로 이탈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끝인가보오-. 체감상 2년 만에 착용한 애플워치에는 1.5km라는 귀여운 숫자가 떠있었다. 귀여운 숫자와는 달리 나는 곧 죽을 사람처럼 힘들어하고 있었다.
혼자 헥헥 대며 깨달았다. ‘마라톤 참여’라는 공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타고나길 생각 많은 N형 인간인 나는, 돌이켜보면 현재보다 머릿 속에 살았던 시간이 더 많았다.
나의 공상들은 나를, 어떨 땐 ‘아무것도 할 수없는 존재’로, 어떨 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잡히지는 않지만, 머릿 속에 생생하게 존재하는 현실에서 나는 주로 좌절했다. 그리고 가끔 기고만장했다.
성시경씨의 <먹을텐데>에 출연한 김완선씨는 말한다.
40대에 고민을 제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과연 내가 이 일을 언제까지 더 할 수 있을까? 저 자본으로 해가지고 남들이 들을 기회가 없는 이런 상황에서 이런 것을 더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다 어느날,
일단 생각이 내 인생이 되지는 않는거 같아. 그냥 행동이 내 인생이 되는거야.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거야. 그 행동만이 내 삶이되고 내 인생이 되는 거지. 생각은 백날 해봤자 그게 계속 제자리에 있는 것 같더라고요.
두 다리로 직접 디디며 뛰면서, 마라톤에 참여해볼까 하는 생각 따위 집어치우게 됐다. 이게 런닝의 매력인걸까.
대신 다음주에도 달리기로 했다. 꾸준히 달려서 페이스는 낮추고, km는 올리고 싶어졌다.
이 목표는 N형 인간의 10km라는 원대한 꿈에서 조금 더 현실적인 목표로 변환된 결과였다.
'두 발로 디뎌진 것만이 현실이다.’
2km의 달리기는 이것을 알려주었다.
두 발을 디뎌야만 앞을 향해 달릴 수 있는 것처럼,
모쪼록 내 인생도 만지고 경험할 수 있는, 생생한 어떤 것으로 채워지길 바래본다.
그렇다면 고통은 피할 수 없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