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7 파랑새와 할단새

그림자가 이끌다

by 해리포테이토

7. 파랑새와 할단새


트레킹 시작점에 도착한다. 당신은 처음으로 땅을 딛고 서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발바닥에 온전히 집중한다면 땅의 음성이 들릴 것 같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흙길, 돌계단, 흐르는 계곡물소리.


당신은 히말라야에 오르는 것은 영혼의 상승이라고 생각한다. 상승은 해방이라고, 타오르는 목마름은 해소되리라고. 누군지 모르는 그 누군가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기다림의 종착역 같은 곳이라고. 당신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걷는다.


그림자를 밟으며 걷는다. 오래된 마음이 이끌어간다. 성마른 친구처럼 마음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완벽을 추구하는 가혹한 선생처럼 해묵은 마음이 당신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익숙하고도 오래된, 그림자처럼 떼어내려 해도 떼어낼 수 없는. 당신은 흙을 밟으며 걷는다. 자잘한 돌자갈들이 빠스락대며 짓이겨진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당신은 발에 힘을 준다.


그림자가 나를 이끌었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발을 잡아당기는 건 그림자

히말라야가 드리운

차갑고 하얀 그림자 속

내가 꿈꾸던 히말라야는

삶이 아니고

죽음

잘 살기 위함이 아닌

잘 죽기 위해서

높고 하얀 설산 어딘가

길을 잃고 헤매다

손 발이 얼고 팔다리가 얼고

결국은 심장이 얼어

잠에 드는 꿈

아주 옛날부터 나는

막연히 그런 꿈을 꾸었어

잊고 있던 꿈

아름다운 죽음에의 꿈.


당신은 걷는다. 낯선 숨 막힘. 가슴 깊은 곳까지 산소가 부족한 듯 턱턱 막혀오기 시작한다. 새장 안에서 발버둥 치는 새처럼 심장은 빠르게 뛴다. 머리는 안갯속에 갇힌 듯 띵하다. 흙길을 걷는 발걸음은 처음엔 가벼웠지만, 경사가 가팔라지자 허벅지 근육까지 뻣뻣하게 굳어온다. 발목과 무릎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싸늘한 공기는 폐 속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콧속은 건조해서 따끔거린다. 땀은 나지만 차가운 바람에 금세 식어서 오히려 체온을 떨어뜨린다. 당신은 연신 마른침을 삼키지만 목은 바짝 타들어 가고 입술은 하얗게 말라붙는다.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 싶지만 뒤처질까 하는 불안감에 멈출 수도 없다.


헉헉거리는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지고 욱신거리는 무릎은 이제 걷는 행위 자체가 고문처럼 느껴진다. 머릿속은 망치로 두드리는 듯 욱신거린다. 속은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복합적인 고통이 한꺼번에 당신을 덮쳐온다. 그래도 당신은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통이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한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채색한다. 익숙하지 않은 고통으로 정신이 몽롱해질 때쯤 당신은 다시 고개를 든다. 주변을 돌아본다. 머리 위로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거대한 히말라야가, 발아래로는 온갖 야생화와 이끼 낀 돌들이 펼쳐져 있다.


그때다. 짙푸른 잎을 가진 히말라야 삼나무 숲을 지나 좁은 오솔길에 접어들었을 때 당신의 시선을 사로잡는 움직임이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작은 새들의 무리가 푸드덕 날아오른다. 작고 영롱한 푸른빛의 새 한 마리가 당신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다. 파랑새다.


"저 새는... 이름이 뭐예요?"

파랑새를 가리키며 텐진에게 묻는다. 텐진은 당신의 시선을 따라가 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아, 저 새요? 저 새는 히말라야 쇠유리새라고 해요. 여기 산에서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새로도 알려져 있죠. 저의 이름처럼."

텐진은 자신을 가리키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날아올랐던 새들이 다시 삼나무 가지에 내려앉는다. 히말라야 쇠유리새는 배부분은 하얗고 등과 날개는 파랗다. 경쾌하고 맑은 소리로 지저귄다. 이어서 붉은빛 깃털의 새와 연노랑빛의 새도 날아와 앉는다. 새들은 잠시 당신의 일행 주위를 맴돌더니, 마치 인사를 건네는 듯 당신의 눈높이에서 나란히 날아간다. 그들의 작고 가벼운 몸짓이 한없이 자유롭게 느껴진다. 당신은 문득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이 떠오른다.


"마담, 히말라야에는 새들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가 있어요."

텐진이 말한다.

"할단새라고 들어보셨나요?"

당신은 고개를 젓는다. 텐진은 걸음을 멈추고 삼나무에 기대어 앉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옛날에 이 히말라야 산자락에 할단새라는 새가 살았다고 해요. 이 전설의 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평생 집을 짓지 않고 떠돌아다닌답니다. 낮에는 따스한 햇살 아래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놀았지만, 밤이 되면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시달렸어요."

텐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당신을 본다. 당신은 새의 특별한 능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밤마다 추위에 떨던 할단새는 후회하며 다짐하지요. 내일은 꼭 집을 지어야지. 그래서 이 고통스러운 밤을 피해야지. 하지만 해가 뜨고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면 간밤의 고통과 다짐은 거짓말처럼 사라져요. 할단새는 다시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즐겼고 집을 짓겠다는 생각은 또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그리고 다시 밤이 오면 추위 속에서 또다시 후회와 다짐을 하고요."


당신은 어렸을 때 언젠가 들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그때를 더듬어본다. 텐진이 덧붙인다.

"그렇게 다짐만 하다 결국 영원히 둥지를 짓지 못하고 멸종되었다는 슬픈 전설이죠. 마담은 이 이야기가 어떻게 들리세요?"


텐진의 질문에 당신은 쉽게 답할 수 없다. 슬프고 허무하지만 동시에 공감이 된다. 당신의 삶을 투영한 듯하다. 당신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텐진은 당신의 복잡한 표정을 읽었는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다시 걷기 시작한다.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07화6 경건함으로 깨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