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골무가 있는 풍경
날이 차가워지니, 지는 해가 빨간 골무 같다. 어제는 반팔 티셔츠를 입었는데, 오늘은 찬바람이 거리의 풍경을 북북 스프링노트처럼 뜯어냈다. 서어나무가 휘청했다.
아직도 남아있는 노라노 복장학원 출신 골목길 송은혜 양장점처럼 쇼윈도우에 마네킹들이 은혜씨가 북북 뜯어 고친 단아한 정장 같은 풍경을 걸치고 서있었다. 허리가 잘록하고 스커트는 살짝 무릎을 덮었다.
은혜씨, 어깨 뽕을 뜯어내고 품을 줄이니 오트쿠튀르Haute couture가 따로 없네요. 거리가 고조곤하고 세괃은 가시 하나 없네요. 당신의 솜씨로 거리가 깨끗해졌어요. 저는 쌀쌀한 이 공기가 아주 좋은데요. 그런데요. 이 쌀쌀이 꼭 쓸쓸인 것만 같아, 오늘은 뒤로 걸어보았어요. 오던 자전거가 딸랑거리며 뒤로 걷는 나를 비켜 갔어요.
등으로 달려갔다 끝까지 널 응시하면서
잘 잊었으니 내게 상을 줘야 한다
-손미 ‘역방향
이렇게 무개화차처럼 낯선 말들이 비켜 지나가는 11월이 으늑하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네, 그래요. 그렇구 말구요. 당신의 브라더 미싱에는 ‘프리덤freedom’이라고 써있었구요. 당신은 영어는 한 자도 모르는 까막눈이라구요.
그래두 당신은 저녁 풍경을 뜯어고치는 기예가 있잖아요. 빨간 골무와 뜯어진 풍경의 속단을 빠르게 뚫고 휘감치는 그 날렵한 바늘이 있잖아요.
뚫고 지나갔던 공기가 다시 모이고 뚫고 갔던 몸이 다시 온전해지기까지
-손미 ‘역방향’
그렇습니다. ‘고조곤’은 소월의 ‘꿈자리’의 말입니다. 자주 가 안녕 인사하는 습지의 갈대는 베어졌어요. 못 아래는 더 이상 아늑하지도 않고 썩는 시궁창 냄새가 났습니다. 심지어 새우깡 블랙 봉지가 검은 흙 속에 박혀 있었어요.
솔가지 하나를 구해 그 봉지를 구해냈습니다. 봉지에는 ‘친환경 재료로 페트병을 재활용한 것입니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출시되기 직전 이런 제품을 감수하고 있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저녁 풍경이 빙빙 돌아가고요.
세상의 모든 기차가 출발하고 있다
-손미 ‘역방향’
그래요, 맞습니다. 호동그랗던 인간의 눈은 아늑한 풍경을 고조곤히 바라볼 시간이 없어요. 기차가 지나가는 굴다리마저 아늑하거나 더 이상 거룩하지도 않고 살뜰하지도 않았습니다. 굴다리 끝에 달고나 냄새를 내는 계수나무도 칼 갈아주는 사람도 더이상 오지 않았습니다.
그 기차가 지나가는 굴다리 같은 그 중간의 으슥한 지대는 ‘으늑하다’는 황현산의 말을 낳았습니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공간과 시간을 초래했어요. 으슥하고 불길한 아늑함이 멈칫하는 순간이면 우르릉 11월 굴다리를 지나갔어요.
지루한 날마다 지루한 송충이를 따라갔다
송충이는 기어서 기어서
나무에 오르다가
손을 모으고 나무에 얼굴을 묻은 사람의 티셔츠 속으로 떨어졌지
-손미 ‘역방향’
그러게요. 뭔가 스물스물해요. 저녁에 전철 플랫폼에 서있는데, 목덜미가 이상했습니다. 플랫폼에는 유리돔 같은 것이 씌워져 있었는데요. 송충이었습니다. 어디서 이 송충이들은 기어나온 것일까요.
반팔 티셔츠를 입던 풍경이 하루 저녁에 겨울 외투를 갈아입었지만요. 유리돔은 열섬과 같이 더웠습니다. 외투가 가두던 영하의 날씨가 없는 플랫폼에 여름이라고 착각한 송충이들이 그물그물 모여 있었습니다.
끝나지 않는 터널을 지나는 기차
포식자의 위장을 내려가는 산 물고기
여기는 어디인가
-손미 ‘역방향’
그렇지요. ‘세괃은’은 백석의 ‘선우사膳友辭’의 말입니다. 맑고 해정한 모래톱은 발치에서 점점 사라져갔어요.
‘호동그란’은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의 말입니다. 세상의 눈은 가짜뉴스를 실어나르는 전광판처럼 안염이 번져 진물이 나며 감겼어요. 모든 사물과 세계는어느새 역방향으로 질주하거나 방향을 착각했어요.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행성을 뒤집어서 우리의 방향이 바뀐다면
마주 볼 수 있을까
-손미 ‘역방향’
그러게요. ‘얌통머리 없다’는 말은 그 플랫폼의 송충이가 내게 건네준 말입니다. 이제 염치, 아니 얌통을 잃은 우리의 따귀를 치며 악천후는 매일매일 날씨를 교차해가며 방문하는 것일까요.
‘얌통’은 겨울 일용직 인부를 위해 폐자재를 태우는 드럼통과 엇비슷하게 따뜻한 불티를 탁탁 튀기며 하나씩 온기를 배당해 줍니다. 공정하고 평등하고 ‘프리덤’하게 온기를 두 손에 나누어 쬐어줘요.
나는 자주 너의 꿈을 꾼다
내가 잘못한 걸까
잘 살 수 있을까
-손미 ‘역방향’
11월 송충이는 엄중했습니다. 염치를 상실한 자들. 얌통을 상실한 자들의 표면은 급행 기차와 비슷해 연착과 연발을 했구요. 11월 저녁 어깨 위 견장은 사라진 해정한 모래톱처럼 빛을 잃었어요. 가멸차게 부는 경종警鐘의 호각엔 언제나 푸른 침이 고여 끈적댑니다.
없이,
너 없이,
없이,
우리 없이,
-손미 ‘역방향’
‘헹맹이 없다’라는 말 역시 겨울 외투를 입고 땀을 비질거리며 흘리는 나에게 송충이가 건넨 말입니다. 여기 유리돔 속은 여름인데 좀 품위를 지키시오. 품위를 지키지 않는 당신이 나를 해충이라고 부를 수 있으시오.
두 손은 언제까지 두 개일까
우리는 언제까지 상관있을까
-손미 ‘역방향’
두 손을 이용해도 송충이를 떼어내기 어려웠습니다. 두 손으로도 도저히 그 스멀거리는 정체를 잡기 힘들었어요. 쩔쩔매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휴지를 뭉쳐 그걸 떼어냈어요.
등으로 달려간다
끝까지 마주 보면서 멀어진다
-손미 ‘역방향’
송충이는 침엽수를 갉는 유해충이기만 할까요. 그 순간 멀리 반짝이는 송은혜 양장점 40년 전통 네온사인 불빛이 기차처럼 드르륵 풍경을 박으며 초과해 갔습니다. 블랙 새우깡 봉지 같은 어둠이 플랫폼 위 유리돔 위를 철썩대며 때렸어요.
광고 속의 여자가 달려가다 뒤돌아보며 멈칫했습니다. 송은혜 양장점의 빨간 정장을 입고 있는 마네킹처럼 이목구비가 지워져 있었습니다. 흠칫했어요.
스크린도어에 반사되는 해가 빨간 골무를 엄지 손가락에 급하게 끼웠어요. 페트병처럼 투명해진 풍경에 재봉틀의 노루발을 놓았어요. 이런다고 날씨가 반성문을 써대며 고쳐지지는 않겠지요. 다 ‘세괃은’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지요.
*장욱진, 일일시호일
*손미 ‘역방향’
#기후행동#사라진말#너나우리#공존#두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