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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ONN 에콘 Nov 21. 2021

다 탕진하고 싶은 엄마의 유산

30대 육아가 한창일 즈음 내 별명은 '돌아이 육아맘'이었다. 40대 들어 채식을 시작한 후론 '옆집 비구니'가 그 자리를 대신 꿰찼다. '돌아이 육아맘'하면 느낌이 오는 것처럼 난 남들과 다른 육아 방식의 소유자였고 '옆집 비구니'는 흔해 보이는 중년 아줌마가 채식이라는 금욕을 실천하는 희귀한 행태다 하여 붙여진 별명 되겠다. 그 외에도 살면서 들어본 별명 중에는 온 지구에 대해 밑도 끝도 없이(정말 밑도 끝도 없다. 학연, 지연, 사회, 나라를 벗어나 그냥 인간, 동물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측은지심을 가졌으니....) 궁휼을 펼치고자 한다 해서 '박애주의자',  '박애주의자'와 라임을 맞춰 비꼰 별명 중에는 뭔가 계획만 세우면 말뚝 박은 듯 해내고야 마는 성격 때문에 '박아주의자' 등이 있다. 이 별명들은 내 행태에서 비롯된 것이니 뭐라 할 변명 없이 좋은 의미로 포장해 버리고 말면 그만이었지만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별명이 하나 있다.


'가지장아찌'... 이 단어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동네에서 나 혹은, 나의 행동의 모든 것을 총칭하던 별명이었다. 예를 들어 "야. 가지장아찌 왔다. 가지장아찌 깍두기 시켜.", "오늘 가지장아찌가 놀이터에서 넘어졌대.", "가지장아찌네 놀러 가자."등의 말로 말이다.

소아천식으로 일 년이면 봄, 가을 연중행사로 한 달씩 넘게 병원에 입원했다 나오면, 난 기관지 속 공기만 잃었던 게 아니라 체중도, 체력도, 친구도 모든 것을 잃었었다. 병색이 짙어 다시 사람다운 살갗을 가질 때까지 몇 개월이 걸리고, 또다시 병을 앓고, 또 사람다움을 잃고의 반복이었으니 거멓게 뼈에 달라붙은 거죽만 남은 내 외모가 별명이 된 것은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친정엄마의 귀에 이 별명이 꽂힌 날엔 본인의 잘못을 지적당한 것처럼 괴로워하셨다. 내가 아픈 아이를 낳아보니 이제야 극명히 아는 것이지만 본인의 잘못처럼 느껴지셨을 게다. 다른 아이들처럼 맘껏 뛰놀지도, 이것 저것 배우러 다니지도 못 하는 나를 보며 친정엄마는 외모 놀림은 고사하고 '동네 바보'소리를 들을까 심히 근심이 크셨다. 배움이 길지 않은 전후 세대 여성의 표본인 친정엄마는 배움에 관련되어 본인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일이었던 '책 읽기'(한글 읽기로 바꿔 써도 되겠다.)를 떠올렸다. '가지장아찌'를 앉혀놓고 계속 책을 읽어 주신 것이다. 심심함이 끝이 없던 내게 엄마가 읽어주시는 책은 스노클링 장비를 끼고 태평양 바닷속을 뛰어드는 것과도 같았다. 난 무섭도록 빠져들었다. 우리 집에 가장 많이 오는 손님은 당시 '계몽사'라는 출판사의 영업사원이었고 안방, 거실, 부엌 할 것 없이 책이 쌓여갔다. 난 전집이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고 다 읽어버리고는 두 눈 껌뻑이며 출판사 아저씨를 기다렸다. 책값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책을 못 들이는 달엔 엄마는 우리 집에 없는 책을 산 집을 수소문 해 그 집에 놀러 가게 해 주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친척 집이든 식당이든 우리가 가야 하는 행선지를 말하면 나의 첫 질문은 "그곳에 책이 얼마나 있어요?"였단다.

이도 저도 책 볼 곳이 없으면 내 성화에 못 이겨 엄마는 날 은행으로 데리고 가셨다. 여름이면 에어컨 쏘이러 방문한다는 은행 창구를 나와 엄마는 책을 읽으러 방문했다. 고객용 의자 옆에 놓인 시사잡지, 카탈로그 등을 읽어주셨다. 그것도 다 읽어주었는데도 책 사줄 형편이 풀리지 않으면 엄마는 은행의 고객 유치용 상품설명 브로셔를 (그 당시에 뭐라 그것을 명명했는지 모르겠지만, 예금 이자가 몇 프로 등이 적혀 있던 전단지였다.) 들고 와 무슨 말인지도 이해가 안 가는 그 종이쪽지를 읽어주셨다. 이해가 안 가는 어른들의 말이 난 신기하고도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옛날이야기 보따리같이 느껴졌다.


첫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 퇴소를 하고 나니 친정엄마가 미역이며, 몸에 좋다는 음식, 아기용품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다.  먹을 것들은 풀어 냉장고에 넣으시고, 아기용품은 내 손 닿는 곳에 놓아두셨는데 엄마가 돌아간 후에도 한 봉지만 한편에 우두커니 자리 잡고 있었다.

펼쳐보았다. 읽기가 내 전부이던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아끼던 책들이 들어있었다.


빛바랜 책장들.



잊고 살았었다. 그 책을 읽었었는지, 그런 책을 내가 좋아했는지, 그 책이 나와 엄마가 살던 친정집 어딘가에 고이 모셔져 있었는지 난 아무것도 모른 채 어른이 되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 수 백, 수 천 권의 책 중에 엄마는 내가 아끼고 몇 번을 되풀이했던 책을 고이 간직하고 계셨던 것이다.


사람은 시간이 지난 후, 같은 장소에는 갈 수 있어도 같은 시간엔 갈 수 없다. 하지만 그날 엄마는 그 책을 읽던 80년대의 시간 속으로 날 보내주었다. 엄마가 그날 내게 주신 건 빛바랜 책만이 아니라, 그 책 속에 담긴 보이지 않는 유산이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너와 나의 시간이 어떠했으며, 넌 앞으로 어떤 시간을 보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 담긴 유산.


책을 안고 한참을 흐느꼈다. 아픔과 외로움을 잘도 견딘 그 시간 속의 내가, 그 시간을 견디라고 책을 소개해준 엄마가, 묵묵히 내 곁을 지금까지 지켜주고 있는 책들이 너무도 고마워서.. 그리고 영영 잊고 살 뻔했던 그 시간 속을 다녀올 수 있어서... 그리고 힘든 시간마다 날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던 것들도 '책'이라는 질료였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어서...


그날, 어쩌면 내 육아의 방향성이 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난 엄마에게 받은 유산을 남김없이, 아낌없이 나누어 쪼개어 쓰고 있다. 똑같이 읽어준다. 책이 없어 심심해하면 전단지를 읽어주고, 보험 약관을 읽어주고, 전단지의 글자를 잘라 붙이며 한글 놀이를 하고, 제품 설명서를 읽으며 제품을 조립했다 분해했다 하며 내 아이들의 유아시절을 소모시켰다. 앞서 쓴 글 '응원이 필요한 도전기'를 통해 밝혔지만 아픈 내 두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일 말고는 딱히 해 줄 일도 없었다.

다른 엄마들이면 아이의 시간을 유튜브나 티브이 만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쉽게 채웠겠지만, 하도 책을 읽어주니 아이들은 영상매체를 탐닉할 만큼 심심할 틈이 없었다. 심지어 가족의 규칙을 어길 경우,  책을 2-3일 읽지 못하게 하는 벌을 주었는데, 그 벌이 지금까지도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벌로 통한다.


남들 다 시키는 영어교육도 똑같았다. 영어책을 사서 되지 않는 발음으로 매일 읽어줬다. 에이, 설마 매일 읽어줬겠어? 묻겠지만 정말 매일 읽어줬다. 그래야만 친정엄마가 물려준 유일한 그 유산을 허투루 쓰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읽어주는 영어 책으로는 모자라 영어 DVD를 보여주고, 영어 오디오북을 틀어주고.. 그렇게 십 수년을 한국어 책과 영어책을 섭렵해 버린 내 두 아이들은 사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았음에도 영어 발표 수업이 있는 날에는 "어느 나라 살다 왔어?",  시험 성적이 나오는 날에는 "너 어느 학원 다니니?"라는 질문을 받는 학생으로 성장했다.


학교 선생님과의 면담이 있는 날은 모든 학부모들이 긴장한다. 나도 첫 면담에는 그랬다. 하지만 만나 뵙는 선생님들이 하신 말씀은  "아이를 어떻게 키우셨어요?, 반에서 가장 잘하는 아이예요. (화들짝) 학원을 안 다닌다고요?, 아이의 눈빛이 반짝거려 수업 준비를 더 하게 돼요." 등이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하고 있는 엄마의 유산 탕진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학원을 보내라. 레벨테스트를 받아봐라. 지금 성적 잘 나와봤자 의미 없다. 고등학교 가면 선행한 아이들이 선두 꿰차는 건 당연한 거다....". 내가 들은 우려 섞인 잔소리야 이 지면에 다 적을 수 없이 넘친다.

하지만 난 책이라는 원칙을 지킨다. 아이들이 어떤 과목을 힘들어하면, 씁쓰름한 샐러드에 소스 찔끔 뿌려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처럼 입맛을 잃어 떠 넣기 싫은 과목에 관력 책이라는 소스만 끼얹어 줄 뿐이다. 그럼 아이들은 금세 흥미를 되찾고 반복해 낡아질 때까지 그 책을 읽고 다시 그 과목에 대한 관심을 학교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궤도까지 올려놓는다.


조선의 실학자 박지원이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후 수레 도입의 필요성을 설파하자, 다른 관료들이 "우리나라는 길이 험해 수레를 쓸 수 없다"라고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그때 박지원이 말한다.  "수레를 쓰지 않으니 길이 닦이지 않을 뿐이다. 수레가 다니게 되면 길은 저절로 닦이게 될 터인데, 어찌하여 길이 좁고 산길이 험하다 걱정하랴"라고. 난 아이들에게 책을 읽는 것이 수레로 생각을 나르는 일이라고 비유하곤 한다. 우리가 읽은 책이 바퀴를 달고 누군가에게 전달이 되고 그 생각들이 이어져 길을 만드는 것이라고.


내 책장의 책까지 집 안의 책이란 책을 다 읽은 첫째 아이는 지금도 밀리의 서재에 들어가 내가 담아놓은 책을 보느라 주말을 다 써버렸다. 아직 자지 않고 꼼지락거리는 열 살짜리 둘째에게 오늘 밤 나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10대의 눈높이에 맞춰 재편한 '10대를 위한 JUSTICE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줄 생각이다. 열 살에게 책을 읽어준 다고? 난 그렇다. 먼 훗날 내 아이들에게도 같은 시간 속을 여행하는 유산을 물려주고 싶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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