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역은 왜 가락국수로 유명했을까?
내가 어릴 땐 고속열차가 없었다. 그 당시 제일 삐른 기차는 새마을호였는데 그걸 타도 서울-부산이 거의 5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멀미가 심했던 나는 정말 어릴 때는 기차만 타면 토하고 축 늘어져 있기 일쑤였는데, 조금 크고 나서는 기차 타는 걸 재밌게 생각하게 되었다. 주로 아빠랑 둘이 타고 다니면서 기차 안에선 주로 아빠와 같이 책을 읽고 한참 구구단을 배우던 시기에는 서울-부산을 왕복하는 기차 안에서 구구단을 뗐었다. 내가 어릴 때 지금과는 달리 꽤 자상했던 아빠는 책꺼풀을 벗겨서 거기에 연필로 구구단을 1단부터 9단까지 써주셨었다. 그때는 다들 책을 많이 읽고, 또 책을 소중하게 생각했었기 때문에 들고 다니면서 읽을 때는 책 표지를 포장지로 한 번 싸서 다니곤 했었다. 신학기가 시작되면 학교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도 새 교과서에 책꺼풀을 입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옛날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하여튼 그때는 기차 타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기차 안에서는 승무원이 간식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삶은 계란부터 갖가지 과자들을 팔았고, 대전역에서는 ‘가락국수’라는 것을 팔았다. 그 당시 다른 역도 많았는데 왜 하필이면 대전역이 가락국수로 유명했는지는 모르겠다.
가락국수는 흔히 우동의 우리나라 말이라고 하는데, 내 생각엔 조금 다른 것 같다. 가락국수의 면은 우동보다는 덜 탱글거리고 우동 면 모양이긴 하지만 오히려 부드러운 느낌이다. 쑥갓과 오뎅이 꼭 들어가고, 취향 따라 추가하기도 하는 새우튀김은 일본의 덴푸라와는 다르게 폭신폭신한 느낌의 튀김이다. 우리나라 제사상에 올라오는 것 같은 새우튀김. 국물도 가쓰오부시 국물과는 다르게 멸치와 양파 다시마 등이 주가 되는 부드러운 맛이다.
기차가 대전역에 도착하기 조금 전부터 아빠는 기차를 내려서 가락국수 가판대로 뛰어갈 준비를 했다. 절대 따라오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기차가 가까워지며 속도를 줄이면 플랫폼에는 기차를 기다리며 가판대에서 서서 가락국수를 먹는 사람들이 보였다. 기차 유리창에 항상 코를 박고 바짝 붙어서 아빠가 주문에 성공했는지, 아빠가 가락국수를 받았는지, 받은 뒤에 아빠가 기차 안으로 뛰어들어오기까지 잠깐 유리창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에는 아빠가 기차를 타지 못해 나 혼자 남겨지면 어쩌지 심장이 두근두근 했었다.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달리 아빠는 항상 성공했었다. 얇은 스티로폼 그릇에 펄펄 끓듯이 뜨거운 국물의 가락국수를 들고 뚜껑도 없는데 가득 찬 국물을 흘리지도 않고 항상 기차로 돌아왔었다.
부산에는 내가 알기로는 이런 옛날식 가락국수를 파는 집이 두 곳이 있다. 남포동에 ‘종각집’과 해운대 그랜드 호텔 뒤쪽 로터리의 ‘훈이네’다. 두 집 모두 딱히 특별한 것도 들어가지 않은 싱거운 옛날식 김밥을 함께 판다. ‘훈이네’는 해운대 술집 거리와 가깝고 코로나 전에는 24시간을 했었기 때문에 새벽이면 우동 먹는 사람들과 김밥을 잔뜩 사가는 사람들로 항상 가득했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김밥을 먹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아니면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갈 때 금방 말은 따끈따끈한 김밥이 손에 들려있는 게 기분이 좋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종각집’은 남포동 옷집 거리 사이에 있다. 남포동 옷집 거리는 항상 사람은 많지만 신기하게 모두들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조용하고 다정한 분위기의 거리다.
이제 기차 안에는 간식 카트도 다니지 않고 아무도 대전역에서 정차 10분 동안 뛰어내려 가락국수를
사지도 않는다. 기차가 너무 빨라져 서울-부산 간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대전역에 정차해서 창 밖을 보면 그 시절이 드라마 속 이야기처럼 희미하게 생각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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