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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층간소음 09화

단서

1부

by 반전토끼







‘지 남편이 딴 년이랑 놀아나는 것도 모르면서 교양 있는 척, 위선만 가득한 멍청한 년?’ 오랜만에 시우를 친정에 맡기고 온 수아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뭐야, 또 그 빨간색 메모! 아니, 근데 우리 남편이 딴 년 하고 놀아... 어머, 이게 무슨 소리야!’라는 생각을 하며 메모를 떼고 급하게 집에 들어간다. “그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협박에 내가 흔들리면 안 돼! 이 메모는 증거로 모아두고, 빨래나 하자!”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얼마 전 출장 다녀온 남편의 캐리어를 정리하려고 캐리어를 여는 순간, 프리지어 꽃내음과 배 같은 과일 향이 한데 섞인 달큰한 냄새가 수아의 코를 매우 강하게 자극한다.





‘음, 향 좋네. 우리 자기는 캐리어에도 방향제를 뿌리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수아는 어디선가 이 향을 맡아본 기억이 났다. ‘어, 이거 향수잖아! 그때 이이랑 백화점 같이 가서 대표님 와이프분 선물로 드린 건데’라며 그날의 기억을 남편의 캐리어 앞에 덩그러니 앉아 더듬어본다. “자기, 갑자기 백화점에는 왜 온 거예요?”라는 약간 들떠있는 듯한 수아의 물음에 “어? 오랜만에 백화점에서 데이트도 하고, 실은 대표님 와이프분 선물 사러 왔어. 그분이 나한테는 멘토 같은 분인데 와이프분 선물 뭐 살지 고민이 많으시더라고. 그래서 이 김에 점수 한번 따볼라고”라는 성혁의 야무진 대답에 수아의 얼굴에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 그렇구나... 뭐 그래요. 난 또 내 선물 사러 가는 줄 알았네”라며 수아가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자, 성혁은 당황스럽다는 듯 “당신이야, 장인어른, 장모님 백화점 VVIP 카드로 사고 싶은 거 다 사잖아. 이런 시답지 않은 향수가 눈에나 차겠어?”라며 비꼬듯 말한다. 성혁의 말에 짜증이 난 수아는 “당신, 왜 이렇게 꼬여있어요? 우리 집에 자격지심이라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만해요, 사람들 보니까!”라며 성혁을 째려본다. “그래, 난 그냥 니네 집 데릴사위일 뿐이니까. 내가 너한테 뭐라고 하면 장인어른이나 장모님이 또 나한테 전화하시겠지. 됐다, 나온 김에 향수나 골라줘. 이 선물은 나한테 중요한 거니까. 그리고 나온 김에 밥이나 먹고 들어가자”라는 남편의 말에 수아는 언짢긴 했지만 할 수 없다는 듯이 향수를 골라주고, 밥을 먹고 들어왔었다. 그날, 그녀가 직접 골라준 향수의 향이 지금 남편의 캐리어 안에서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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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아키비스트 | 노마드 같은 삶을 기록하며, 사회의 흐름을 날카롭게 읽고 일상을 섬세하게 담아냅니다. 반전토끼로는 글을, 북끼리로는 책과 삶을 영상으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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