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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Dec 02. 2022

반장수당 5만 원

결국 가시를 드러내고 말았다

   불과 2주 전 갑자기 경비직을 사직하고 떠난 서 선생이 퇴근  후 나에게 연달아 부재중 전화를 했다. 당시 왜 그만두는 거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냥 개인 사정이라고만 짧게 얼버무리며 말을 아꼈다. 70대 중반인 서 선생은 자식들도 시집, 장가보낸 지 오래됐고, 꼬마빌딩도 하나 가지고 있는 대단한 어르신이다. 어느 날, 대화 중 그에게서 직접 들은 얘기다. 그 정도면 연세도 많은데 굳이 이런 데 나오실 필요가 있 거냐고 물어봤었다. 집에만 있기가 답답하다고 했다. 바깥바람도 쐬고 계속 움직여야 건강에도 것 같아 일을 하게 됐다것이었다. 경비원 혹은 미화원으로 일하는 대다수 어르신들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여기를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서 선생이 오늘 갑작스럽고 급하게 나를 찾는 이유를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애가 타는 듯 휴대폰으로 연달아 전화를 했지만, 나는 일부러 받지 않고 외면하였다. 섣불리 말을 섞으면 일이 꼬여 상황이 곤란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에 앞서 오늘 낮, 봉 반장이 관리사무소로 나를 찾아왔었다. 이달 말일부로 이미 해고 통보된 교대조 장 반장 후임으로 얼마 전 그만둔 서 선생이 오면 어떻겠냐고 추천을 겸해 나의 뜻을 물었다. 서 선생은 사실 장 반장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그만뒀었는데, 이번에 그가 떠나게 됐으니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어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게 과연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궁금했던 사직 이유를 그때서야 처음 들을 수 있다. 봉 반장은 웬일인지  일과 관련하여 무척 서두른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올해 81세 고령인 어르신은 자신이 설령 그렇 앞서가며 밀어붙이더라도 소장인 내가 별 말없이 받아들일 것이라며 자신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거부감이 생기고, 나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강한 의구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평소 어르신으로 존중하고 싫은 소리를 하고 싶어도 그냥 참고 넘어갔던 내가 그렇게 쉽게 보였던 것일까.




   보자 하니, 봉 반장의 태도는 납득하기가 어려운 구석이 많았다. 나는 기분이 언짢아 그의 은근슬쩍하는 말에 즉답을 피했다. 다만, 참고는 하겠으나 미리 정리해야 할 부분이 있으니 조금 기다려달라며 제동을 걸어놓고 퇴근을 하였다. 그의 말만 듣고 즉석에서 서 씨의 채용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마도 얼마 전까지 같이 일했던 동료가 기왕이면 경비원이 아닌 경비반장으로 일할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반장수당 5만 원도 추가로 받게 되니 그런 선의를 베풀고자 하는 마음은 아름답고 좋은 일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내가 그의 말을 좇아 전폭적으로 수용하게 되면, 그의 의도에 휘둘렸다거나 농락당했다는 기분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전혀 다른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60대 후반으로 우리 단지에서 일을 시작한 지 채 3개월도 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솔선수범하고 열심히 일하는 경비원 우 씨를 이번 기회에 반장으로 앉혀 분위기 쇄신을 꾀해볼까 하고 생각 중이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날따라 봉 반장은 오로지 자기 생각만 할 뿐 전혀 나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없었다. 그동안 관대하게 대해준 결과가 결국 이렇게 부메랑이 돼 돌아오는 것인가 싶어 씁쓸하였다. 그는 교묘하게 나의 소신과 자존심을 마구 뒤집어놓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서 선생이 다급하게 나에게 전화를 시도하는 행태는 봉 반장이 나의 보류 방침을 무시하고 오버한 것이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고 더 이상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 양반이 정말 왜 이러시나?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장 반장이 관리사무소로 찾아와 나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소속 경비용역회사 본부장한테서 이달 말까지만 일하고 그만두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게 혹시 나의 뜻인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금시초문이라며 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진작에 사연이 있었다.  반장은 한쪽 귀가 멀어 평소 남이 하는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는 핸디캡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누구와 얘기를 하든 항상 큰 목소리로 말을 해야 했다. 동대표인 김 이사와 대화를 나누다가 큰소리를 주고받으며 다툰 적도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금번 해고 사태는 오래전 그 일로 인하여 빚어진 질긴 결말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마치 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너무 큰 것이 죄라면 죄였던 것이다. 비토 그룹이 생겼고, 그들은 하나같이 장 반장을 멀리하며 하루 빨리 내보내야 한다는 입김을 나에게 직간접적으로 전달하였다. 70대 초반인 장 반장은 여기 그만두면 다른 데 가서 또 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다음날 아침, 출근한 지 얼마 안돼 서 선생이 또 일찌감치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에는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소장님, 다시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선수 치듯 나에게 인사를 하였다. "아니, 서 선생님, 아직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뚱딴지같은 그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내가 되물었다. 그는 당황한 듯 멈칫하며 말을 그쳤다. 이제 상황을 빨리 정리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분명한 입장을 전하였다. 여기서 아무리 오랫동안 근무하였더라도 일단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게 되면 줄 또한 다시 서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반장은 이미 우 선생이 맡기로 하였으니 그 반원으로 일할 의향이 있다면 와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며칠 후, 인사차 관리사무소에 들른 서 선생을 맞이하며 당초 여기서 그만둔 사연을 물어보았더니 봉 반장이 한 얘기와는 전혀 다른 말을 하였다. 새로 간 곳이 더 나을 것 같아서 갔는데 막상 가서 보니 여기만 못하더라는 것이었다.   




   심사숙고 끝에 봉 반장을 관리사무소로 불렀다. "반장님, 3개월 전, 근로계약 만료로 끝을 내려고 했던 일 기억하시지요. 그때 목소리깨나 낸다는 입주자분들이 여기에 몰려와서 반장님이 더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 일은 잘 모르시죠. 나가더라도 장 반장이 먼저 나가야 한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더군요. 놀랐어요. 오늘도 그런 얘기를 한 어르신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나는 장 반장이 더 열심히 해줘서 붙잡고 싶었지만, 그만뒀어요. 반장님은 주민들을 상대로 구명 정치를 너무나 활발히 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80대 고령이시니 반대로 반장님 건강을 걱정하고 우려하는 목소리 또한 없지 않아요. 선생님 앞가림하기도 바쁘실 텐데 이번 서 선생 일로 너무 나서는 바람에 인사에 큰 혼선과 불편이 초래됐어요. 정말 유감입니다. 서 선생을 그렇게 반장으로 추천하고 싶으시면 차차 반장님 후임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요? 여기 간단히 시말서를 한 장 쓰고 가시지요".



   함께 일하는 어르신을 당연히 존중하고 예를 갖추지만, 내가 줏대 없이 비쳤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불찰이다. 꼭 나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장미꽃이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뒤에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도가 지나치면 불가피 추상같은 자신의 면모를 드러내야 할 순간이 있다. 나를 오해한 상대방도 뜨끔하고 충격이 컸겠지만, 나로서는 불가피했다. 비록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는 없으나, 먼 길을 가자면 소신과 원칙을 잃지 말아야 하고, 꺾이지도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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