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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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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어 Sep 09. 2024

폭풍

모래폭풍


 평소보다 뜨거운 공기를 실은 바람이 온 몸을 뒤덮는 바람에 잠이 깼다. 눈꺼풀을 들어 올릴 때마다 눈에 이미 가득 들어간 모래 알갱이들이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한 이물감이 느껴져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처음 며칠 동안은 자고 일어날 때마다 고름 같이 누렇고 진득한 눈꼽이 눈 전체를 덮어 눈을 뜰 수 조차 없었다. 그 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겨우 일어나 앉아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니 눈높이에 어제는 보이지 않았던 짙은 주황빛 벽이 왼쪽 시야가 시작되는 곳에서 오른쪽 시야가 닿는 곳까지 우뚝 서 있다. 보이는 것이라곤 하늘에 떠 있는 것들 - 구름, 천체 따위 - 뿐인 이곳에 별안간 나타난 벽의 정체는 눈을 한껏 찌푸려 한참을 응시하고 나서야 뚜렷해졌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거대한 모래 폭풍이다.


 길을 걸으면서 언젠가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폭풍과 이렇게 먼 거리에서 대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엄청난 스케일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선다. 정신이 아득해져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잠시만 외면하자.


 아니 생각하자. 저 괴물같은 폭풍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살을 잔인하게 할퀴면서 지나갈 것이다. 다만 그 시간이 길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 걸음을 옮길수록 폭풍의 벽이 높아지는 게 느껴진다. 역시 여길 오지 말았어야 했다. 어쩌면 나란 사람은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대책 대신 후회가 찾아오는 걸까.


 차 한 대 조차 지나가지 못할 정도의 너비를 가진 이 '길'은 종착지가 없는,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떠난 자는 있으나 돌아온 자는 없는 - 적어도 다녀왔다고 하는 자는 없는 - 길이며, 지금 내가 딛고 걷고 있는, 그렇기에 실재함을 믿어야 하지만 동시에 믿을 수 없는 길이다. 길의 양 옆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라서 이 길은 그야말로 우뚝 솟아 있는, 끝없이 이어지는 외길이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없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최대한으로 곤두선 신경과 절박하게 긴장한 신체로 인해 매 순간 정신적으로 아슬아슬한 균형잡기를 하느라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은 기본이다.


 그녀는 이 길을 왜 걸으려고 한 걸까?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거나, 자아 성찰, 종교적인 이유, 모험 등의 이유로 산티아고 순례길, 차마고도, AT(Appalachian Trail), PCT(Pacific Crest Trail) 등을 걷는다. 이 길을 걷는 것도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였을테지. 하지만 이 길은 '비'현실의 길이다. 길이란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는 최적의 루트를 기본으로 하여 목적에 따라 갈라지고 합쳐지기도 하는, 길을 이용하는 자들의 상호 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일종의 규칙같은 것이 아닌가. 하나의 길이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거리만큼 이어져 있다는 건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아니면 그저 편협한 생각일 뿐일까.


 모래 알갱이가 살을 점점 아리게 때리는 걸 보니 모래 폭풍이 가까워지나 보다. 빌어먹을, 적어도 길 아래 저 아득한 허공으로 추락하고 싶지는 않다. 저 정도 규모의 폭풍이라면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땅을 파서 비비색을 설치하고 그 안에서 모래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보자. 길의 폭이 넓지 않으니 모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쌓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 아니 간절한 희망을 틔워 본다.


 온 몸에서 흐르는 땀과 불어오는 모래, 흙먼지가 뒤엉켜 마치 진흙탕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엉망이다. 땅을 판 지 한 시간은 된 것 같은데, 바람을 타고 오는 모래가 파놓은 구멍을 금세 메워 버려 미칠 지경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 지긋지긋한 모래 더미에 파묻혀 죽거나 돌풍에 저 아래 깊은 곳으로 떨어져 찢어져 죽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만 두어야 하나... 이 길은 얼마나 걸어야 하는 걸까. 까끌거리는 눈을 간신히 떠서 저 앞 먼 곳을 응시...


 어?





완벽한 표본


 그녀는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게 눈을 뜬 채 중얼거리듯 말을 뱉어냈다.


 "우리는 완전한 무작위성 안에서 존재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의 허무함을 이겨 내려면 온갖 필수적이지 않은 부산물과 규칙들이 필요한거야. 존재하지도 않는 규칙을 만들어내는 것이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얼마나 슬픈 사실이니..."


 세상 어떠한 존재보다 밝은 빛을 내뿜던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그 확신을 뿌리삼아 사회가 원하는 이상향에 가까운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녀 옆에서는 나라는 사람도 그녀가 내뿜는 빛으로 인해 조금은 밝아지는 듯한 기분이었고, 그녀라는 완벽한 표본을 기준삼아 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니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일 년 전, 그녀는 본인 몸집보다 커보이는 배낭을 메고서 집 앞을 찾아왔었다.


 "짜잔- 멋지지? 떠나기 전에 인사하려고 들렀어."

 "떠난다니? 갑자기? 여행가는 거야? 회사는?"

 "좋은 오퍼가 와서 새 직장으로 옮기기 전에 시간이 생겼어. 살면서 처음으로 생긴 여유인데, 나도 뭔가 특별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 거 있지. 순례길 같은 거래. 사실은 비행기 출발 시간이 빠듯한데 왠지 얼굴 보고 인사하고 싶어서 잠깐 온거야. 자세한 건 다녀와서 말해줄게."


 한 달 후에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는 뭔지 모를 낯선 분위기를 안고 있었다. 그녀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그녀는 간단한 메모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길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방황하지 않는 건 아니야..





선택


 이런 현상을 두고 신기루라고 하는 건가 보다. 아니면 지난 며칠 동안 모래 알갱이에 시달리던 각막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거나 뇌에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조금 더 가까이 가서 확인해야겠다. 목표가 생긴다는 것은 이상하게도 그것이 없을 때는 존재하지 않은 것 같았던 에너지를 어딘가에서 끌어와 목표 소유자로 하여금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을 부여하기도 한다. 비비색 가방을 열어 천을 꺼낸 다음 머리부터 발 끝까지 망토처럼 둘렀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뜨거운 공기 속에서 땀은 쉬지 않고 흘러 내리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거세게 살갗에 부딪쳐 오는 모래알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모래 바람이 태양빛을 삼켜 버려 세상은 짙은 회색을 띤 오렌지 빛이 되었다. 한 발 한 발을 앞으로 내딪기가 벅차지만 최대한 몸을 낮춰 최선을 다해 걸을 것이다. 걷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면 기어서라도 갈 것이다.


 고막이 터질 듯한 바람 소리와 바람에 온전히 굴복하여 펄럭이는 비비색 젤라바 - 걸치고 있는 비비색 천 망토를 북아프리카 전통 옷인 젤라바라 지칭해 본다. 어느새 나는 자신을 북아프리카 사막 어딘가에서 젤라바를 입은 채 걷고 있는 유목민에 투영하고 있었다. - 소리 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적막할 것 같던 장소가 세상에서 가장 동적인 소리로 가득차 고요하고도 두려운 장면을 그려내고 있다.


 목표에 다다랐다. 줄곧 하나로서 존재하던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신기루가 아니라 이렇게 눈 앞에 존재하는 갈래길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왼쪽 길로 세 걸음 걸었다가 다시 돌아와 오른쪽 길도 세 걸음 걸어 보았다. 여태까지는 길이 하나로만 이어졌기 때문에 선택에서 자유로웠고, 고민할 필요 없이 걷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는데 두 갈래 길이라니 어디로 가야할까. 갈래가 시작되는 지점에 뒤돌아 와 보니 왼쪽 길이 시작되는 곳에 팻말이 세워져 있다. 손으로 팻말이 뒤집어 쓴 흙먼지를 슥- 슥- 쓸어보니 글씨인 것 같다.


'추천 경로'


 추천 경로??? 누가 이런 표식을 해 둔 걸까? 아니 그보다 추천이라니 무슨 의미일까? 누군가의 장난일까? 일단은 모르겠다. 바보같은 생각이지만 추천 경로라고 하니 어쩌면 이 혹독한 모래 폭풍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어떠한 이유 혹은 의도로 추천하는 길이 지금의 나에게는 최선의 선택이다. 


 1분 정도 걸어온 것 같은데... 해방은 개나 주라지. 


 "아아아악-"


 갑작스런 돌풍에 휩쓸려 몸이 한참을 날았다 바닥에 떨어진 것 같다. 어딘가가 부러진 것 같은데, 다리...는 괜찮고, 허리...도 괜찮고, 팔도 멀쩡하고, 머리도 정상인 걸 보니 알고보면 나는 맷집이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천운이다. 몸 상태가 놀랍도록 평안하다.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냉정하게 살을 때려대던 모래 바람이 왜 느껴지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통각에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눈을 좀 떠서...


 모래 폭풍은 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아직 모래 폭풍 속에 있다. 아니 오히려 눈앞에 보이는 모래 바람의 속도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빨라서 살아 남은 것이, 이렇게 평온한 상태로 서 있는 것이 불가능해야 한다. 가랑비가 내리는 것처럼 온 방향에서 모래 비가 잔잔하게 내린다. 모래 비가 위에서만 내리는 것이 아니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다가온다고 해야할 것이다. 다시 주황빛 벽이 생겼다. 다만 처음 발견한 벽의 모습과는 다르게 시야가 닿는 곳,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 시야가 닿는 곳, 땅을 내려다 보았을 때 그리고 뒤돌아 보았을 때 시야가 닿는 곳까지 온 사방이 벽이다. 어떻게 이런 광.경.이 가능할 수 있지? 마치 모래 폭풍이 벽을 타고 무지막지한 속도로 휘감고 있는 터널을 걷고 있는 것 같다. 멀미가 날 지경이다. 이런 현상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다.


 "나는 죽은 겁니까?"


 하늘을 향해 뱉은 외침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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