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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잘 나가다 결말에서 망한 영화

by 안치용
얼굴


1960~70년대 노동운동사에서 서울 영등포의 방림방적은 인천 만석동의 동일방직 못지않게 자주 거론된 공장이었다. 동일방직이 여공 똥물 투척 사건으로 기록을 남겼다면, 방림방적은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악명이 높았다.


방림방적에 5,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했는데, 거의 여성이었다. 노동자를 뽑을 때 회사는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달리기를 시켜서 잘하는 순서로 정했다. 방적기 20~30대에서 실 뽑는 걸 여성노동자 혼자 감당해야 했기에 달리기가 필수였던 까닭이다. 달리기 시험을 통과한 다음엔 채용 담당자가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해서 손이 뻣뻣하고 굳은살이 있는 사람을 선택했다.


지금의 초등학교 고학년~여중생 정도 나이 소녀가 손이 그렇게 험하다면 어려서부터 이런저런 노동을 경험했다는 뜻이기에 부모가 학교에 보내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즉 잘 달릴 뿐 아니라 배우지 못해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았다. 이름과 주소를 써 보라고 해서 글씨를 잘 쓰고 한문도 쓰는 사람은 일부러 떨어뜨리는 이중선별 과정을 거쳤다.


당시 방림방적의 방적기는 일본에서 중고를 들여온 것이어서 실을 잣는 과정에 자주 끊어졌다. 여성노동자가 자기 구역에서 방적기를 지켜보다가 실이 끊어지면 뛰어가서 끊어진 실을 이었다. 실을 빨리 잇지 않으면 엉켜서 엉망이 된다. 방적에는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가 필요하기에 그 온도를 유지한 상태에서 여성노동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몸에 땀이 흥건해진다. 그 상태로 네 시간쯤 지나면 솜이 온몸에 달라붙어서 멀리서 보면 사람이 아니라 눈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환경은 ‘눈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그런 환경이라면 자주 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화장실을 다녀오면 그새 방적기에 실이 엉켜서 풀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었다. 앳된 나이의 여성노동자들은 결국 옷을 입은 채로 소변을 보는 쪽을 선택한다. 실이 엉키면 그걸 다 풀고 집에 가야 하는데 두세 시간 돈도 못 받는 그 잔업을 지친 몸으로 하느니 어차피 땀으로 젖을 대로 젖은 바지에다 그냥 오줌을 싸는 쪽을 택했다. 아마 누군가가 처음 그렇게 하자 나머지가 따라 하며 관행으로 굳어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구로공단에서 G밸리로-서울디지털산업단지 50년 50인의 사람들』(안치용 외 지음, 한스컨텐츠, 2014년)에 나오는 이야기다. 영화 <얼굴>에서 여공 정영희(신현빈)의 ‘똥걸레’ 일화를 보면서 떠올린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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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민낯?


<얼굴>의 연상호 감독은 이 영화를 “성장 중심 시대가 지워버린 ‘얼굴’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가 직접 쓰고 그린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1970년대 고도성장기, 경제발전이라는 거대한 담론 아래 가려진 개인의 이야기를 파고든다. 시각장애인이자 전각 장인인 임영규(박정민, 권해효 분)의 아들 임동환(박정민)이 40년 만에 백골로 발견된 어머니 정영희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에 밝혀진 진실을 다룬다. 다섯 번의 인터뷰를 통해 겹겹이 쌓인 진실을 벗겨내는 형식을 취하며, 마침내 애써 외면한 어떤 ‘얼굴’을 마주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연 감독은 “관객에게 긴 여운과 질문을 던지길 희망한다”며 성장 시대를 우화처럼 담아내기 위해 임영규와 정영희라는 두 캐릭터를 구상했다. 임영규는 역경을 이겨낸 성장주의의 상징이며, 그 반대편에는 성취와 성과에 가려진 혐오를 온몸으로 겪은 정영희가 있다고 보았다. 감독은 “이 이야기는 성장 중심 시대를 지나 결국 성취해 낸 우리가 지워버린 한 ‘얼굴’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마르크스의 소외


<얼굴>은 단순한 미스터리를 넘어 한국 노동 운동의 상징적 공간인 1970년대 청계천 피복 공장을 배경으로 한다. 얼핏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떠올리게 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등장인물 난장이의 막내딸 이름이 정영희와 같다.


<얼굴>은 정영희의 죽음을 추적하며 당시 여공이 겪은 열악한 노동환경, 만연한 폭력, 그리고 성적 착취까지 다룬다. 특히 ‘똥걸레’ 일화는 비참한 작업환경에 관한 슬픈 소묘다. 화장실 앞의 끝없는 줄과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난 젊은 여공의 실변은 가장 기본적인 생리 욕구조차 충족하기 어려운 노동현장의 현실을 제대로 보여준다. 정영희가 ‘똥걸레’라는 모멸적인 별명을 얻기까지 일련의 과정은 카를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의 신랄한 풍자로 다가온다.


마르크스는 ▲생산물로부터 소외 ▲노동 과정으로부터 소외 ▲인간이라는 유적(類的) 존재로부터 소외 ▲타인으로부터 소외라는 4가지 소외를 설명했다. 보통 생산물과 노동과정으로부터 소외만 주요하게 언급되고 ‘인간’으로서 또는 ‘인간’으로부터 겪는 소외는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라는 유적(類的) 존재로부터 소외(Entfremdung vom menschlichen Gattungswesen)는 “인간은 노동으로 인해 자신의 몸, 바깥의 자연, 정신적 본질, 인간적 본질의 소외를 겪는다(Sie entfremdet dem Menschen seinen eignen Leib, wie die Natur außer ihm, wie sein geistiges Wesen, sein menschliches Wesen.)”라고 설명된다. ‘똥걸레’나 방림방적 일화는 이 소외의 극단적이지만 적절한 예에 해당한다. 우연찮게 <얼굴>은 마르크스를 참조한다.


억울하게 죽은 정영희의 백골은,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일하던 청풍피복과 사장 백주상(임성재)의 착취와 억압의 실상을 드러내는 열쇠가 된다. 청풍피복은 당연히 전태일이 관여한 청계피복과 관련된다. 백 사장은 겉으로 천사라 불리지만 실제로 악덕 기업주인 가공의 인물이다. 이 영화가 계급갈등에 초점을 두었다면 정영희와 백주상 사이의 전선이 중심이 돼야 하지만 이 전선은 곧 흐려지고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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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부 인물들


이 영화는 계급갈등에 머물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내의 추가적 소외와 혐오를 다룬다. 정영희는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못생긴’ 여자라는 낙인이 찍혀 동료 노동자에게도 배척당한다. 철저한 주변부 존재이다. 영희는 출생과 함께 눈을 보지 못하는 임영규와 부부로 맺어져 중첩된 혐오와 배척, 조롱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설정은 마르크스의 계급주의를 넘어서 젠더 외모 장애 등 계급 외의 다른 정체성에 착근한 억압과 차별을 논하는 네오마르크스주의에 맞닿는다. ‘똥걸레’라는 별칭은 자본주의의 계급적 착취 구조 속에서조차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를 찾아 혐오를 배설하는 노동자의 부정적 모습을 포착한 상징이다. 노자 대결 같은 전통적 갈등을 묘사하고 노동자의 긍정적 모습에서 미래 전망을 찾는 텍스트가 아니라는 뜻이다. 저들이 아닌 우리 안의 혐오가 더 사악할 때가 있는 법이다.


동료 집단 내의 혐오와 배척, 특히 ‘못생긴’ 여자를 미녀로 속여 결혼으로 유도한 상황은 임영규를 분노와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못생긴’ 여자를 응징한 영규의 분노와 혐오는 여자를 향했다기보다 자본가와 동료 노동자를 향하며 무엇보다 자신을 겨냥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다시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똥걸레’ 사건이 인간이라는 유적(類的) 존재로부터 소외를 시사한다면 영규의 분노는 ‘타인으로부터 소외(Entfremdung von den Mitmenschen)’를 보여준다. ‘타인’으로 번역한 ‘Mitmenschen’의 ‘Mit’은 ‘함께’라는 뜻이다. 영규는 공간을 함께할 뿐 그들과 함께할 수 없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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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법


<얼굴>은 사회 비판을 넘어 우화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 시각장애인인 임영규가 아무도 모르게 한다고 한 일을 주변에서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고, 영규가 장애 때문에 마무리하지 못한 일은 그들이 돕는 기이한 풍경이 대표적이다. 인식론과 존재론 전반에 걸쳐질 수 있는 이러한 우화적 구조는 조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사라마구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이 눈이 멀었을 때, 오직 한 명의 눈 뜬 사람이 눈먼 것처럼 행동하며 그들을 이끌어간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부부가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얼굴>과는 반대로 남편이 눈이 멀었고 아내는 멀지 않았다.


‘얼굴 없는 얼굴’이 돼 극의 중심을 잡은 정영희의 얼굴은 이 영화의 최대 관심사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잘 끌어오다가 결말에서 이 얼굴 때문에 망쳤다. 눈먼 자들이 눈을 뜨는 『눈먼 자들의 도시』의 결말과 달라야 한다. 비대면(非對面)의 대면이 여러 측면에서 피할 수 없는 결론이어야 한다는 텍스트의 정연한 문법을 감독 겸 작가는 왜 몰랐을까. 눈먼 자들이 눈을 뜨는 것과 ‘얼굴 없는 얼굴’이 얼굴이 되는 건 완전히 다른 지평에 속한다. 긴 여운과 질문을 던지길 희망한다는 연 감독의 바람은 마지막 2%를 넘어서지 못해 무산되고 말았다.



안치용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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