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작가' vs 'TV 작가'
나는 평소 걱정이 없는 편이다. 큰일이야 걱정이 될 때도 있지만, 생활하다 보면 금세 잊어버리곤 한다.
때로는 너무 걱정이 없어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 생각 또한 금방 잊힌다.
한 번은 TV예능에서 8년간 일하다가 라디오로 넘어온 작가님과 커피를 마시다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사실 저는 제가 하는 방송이 한 번도 사고가 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작가님은 놀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요? 저는 항상 제가 하는 방송이 망할 것 같아요. 그래서 ‘플랜 B’, ‘플랜 C’, ‘플랜 D’까지 만들어 놓을 때도 많아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성향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라디오’와 ‘TV’의 차이가 아닐까 싶었다.
‘라디오’는 언제나 생방송이니 사고가 나도 어쩔 수 없다. ‘플랜 B’를 시도해 볼 겨를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TV’는 다르다. 주로 녹화를 하고, 돌발 상황에도 대비가 가능해야 하니, 다양한 대안을 만들어두어야 할 것이다.
작가님은 이런 이야기도 했다.
“처음 라디오 와서 놀란 점이 있어요. 제가 그날 생방송 중에 실수를 살짝 했거든요? 끝나고 피드백 받으려 기다리고 있는데, 방송 마치자마자 다들 ‘퇴근합시다~’ 분위기더라고요. 되돌이켜보니, 그게 라디오와 TV의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싶어요. 라디오는 생방송이 끝나면 방송이 완전히 끝나는 거죠. 그런데 TV는 그게 아니거든요. 거의 24시간이 방송이라고 봐야 해요”
듣다 보니 궁금해졌다.
‘라디오 작가’와 ‘TV 작가’의 공통점과 차이점!
8년 차 예능 작가에게 묻는 TV 작가의 세계, 지금부터 들어본다.
Q. 방송 작가를 꿈꾸게 된 계기는?
A. “방송 작가 해보는 건 어때?” 아버지께서 무심코 지나가는 말로 하셨던 그 한 마디가 시작이었어요. 어릴 적부터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순수 문학 쪽은 관심이 생기지 않았거든요. 잠깐의 대화였지만, 그때부터 ‘방송 작가’라는 직업을 알아보기 시작했죠.
Q. 어떻게 방송 작가가 되셨나요?
A. 대부분 방송 아카데미로 시작하는 것 같아요. 아카데미에서 과제도 하고, 현직 작가님들께 방송 이야기도 들으면서 나에게 맞는 프로그램을 찾아가는 거죠. 그리고 사실 방송 작가 구인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물론 우연히 방송 쪽으로 입문하시거나, PD를 하다가 작가로 전향하는 경우도 봤지만, 아무래도 아카데미를 통하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작가를 지망하는 많은 분들이 가장 먼저 아카데미를 찾지 않나 싶어요.
저 역시 방송 아카데미를 수료했어요. 처음엔 등록금이 비싸서 망설였는데, 감사하게도 어머니께서 지원을 해주셨어요. 보통 아카데미 수강 기간이 3개월 정도인데, 저는 다행히 이모가 서울에 사셔서 방세 없이 다녔던 기억이 나요. 다른 지역에 살았던 친구들은 고시원에 살거나, 멀리서 몇 시간씩 통학하고 그랬거든요. 아카데미를 함께 수료한 친구들과는 방송 일을 시작하고도 계속해서 교류하는 것 같아요. 지금도 만나면 “우리는 서로에게 n백만 원짜리 친구다”라고 농담하기도 해요.
Q. 방송 작가가 되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뭔가요?
A. 우선 방송 작가는 ‘방송국’에 취업을 한다기보단, ‘프로그램’에 취업을 한다고 봐야 해요. 특정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로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글을 바로 쓰진 않아요. 프로그램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보통 홈페이지 예고나 설명, 보도자료 정도 작성을 시작하고요. 자료조사나 리스트업(콘텐츠 정리)과 같은 기초적인 일들을 먼저 배우죠. 하지만 막내 작가의 일은 명확히 정해진 게 없어요. 선배 작가 시키면 그게 막내 작가의 일이 돼요. 그래서 저희끼린 작가를 ‘잡가(온갖 잡일을 한다는 의미)’라고 부르기도 하죠.
Q. 그럼 ‘막내 작가’는 언제쯤 탈출할 수 있는 거예요?
A. 그것도 선배 작가의 재량에 달렸어요. 방송 작가가 처음 원고를 쓰기 시작하는 걸 ‘입봉’이라고 부르는데요. 예능 프로그램 같은 경우엔 6년 차인데도 아직 막내 작가인 분들도 계시고요. 교양 작가는 1년 만에 ‘입봉’을 하기도 하죠. 저 같은 경우엔 3년 차에 입봉 했어요. 다른 예능 프로그램에서 막내 작가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는 선배에게 연락이 왔어요. “너 입봉 할래?”라고요. 그날 저녁에 맡고 있던 프로그램 선배 작가님께 상의를 드렸더니, 자기 일처럼 기뻐하시면서 얼른 입봉 하러 가라며 축하해 주셨던 기억이 나요.
Q. 방송 작가로 일하며 가장 노력했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A. 아무래도 예능에 오래 있다 보니까, 자막을 가장 잘 쓰고 싶더라고요. 프로그램 피드백 하면서 제가 자막 쓴 부분이 재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것보다 가장 기뻤어요. 더 잘 쓰고 싶어서 예능 프로그램을 많이 챙겨봤죠. 무엇이든 자주 보고, 따라 해 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또 하나는 ‘틀을 깨자’는 생각이었어요. 방송 이외의 이야기이기도 한데요. 사실 막내 작가를 하다 보면, 좋은 선배도 많이 만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많거든요.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입봉을 하면 나도 못되게 변하려나?”, “막내를 미워하게 되려나?”
막내 일 땐, 연차가 쌓이면 자동적으로 막내에게 살갑지 못한 사람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입봉을 하고 후배들이 생겨보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건 그냥 사람의 차이였어요. 제가 어떤 선배가 될지는 결국 제가 결정하는 거였죠. 관례대로,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굴지 않으려 많이 노력했던 것 같아요.
Q. 프로그램 녹화할 때, 작가들은 주로 어떤 일을 하나요?
A. 촬영하는 장면을 보통 연출된 ‘연극무대’라고 생각해요. 모니터에 어떤 장면이 나오는지를 여러 사람들이 반복해서 신경 쓰죠. 그런데 감독, 조연출, 피디가 아무리 확인하고 점검해도 화면에 나오면 안 되는, 걸리는 부분들이 꼭 하나씩 있어요. 그런 놓치는 부분이 없도록 작가도 함께 모니터 하며 확인해야 하죠.
또 하나는 즉석에서 촬영 장소나 인터뷰 대상을 섭외해야 할 때가 있어요. 프로그램을 특정해 말할 순 없지만, 출연자들이 이동하며 촬영하는 예능 프로그램 같은 경우엔 작가 공고를 낼 때부터 “손이 발이 되도록 빌 수 있는 분”과 같은 문구를 적곤 해요. 실시간으로 촬영 장소 섭외가 이뤄져야 하니까요.
Q. 라디오와 TV의 가장 큰 차이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A. 보통은 라디오 작가가 ‘방 안’에서 일한다고 하고, TV 작가는 ‘현장’에서 일한다고 생각하시는데요, 둘 다 해보니, 저는 그 반대인 것 같아요. TV는 실수가 있거나, 돌발 상황에선 녹화를 끊어가거나, 이후에 편집이나 수정할 방법이 있지만, 라디오는 생방송에서 그게 안되잖아요. 방송을 할 때마다 느껴요. 라디오는 ‘현장’, 그 자체이구나. 오히려 TV가 ‘방 안’에서도 일 할 때가 많죠. 녹화 이후에도 편집, 자막 작성 등 할 일이 많으니까요. 거의 24시간 방송이 이어진다고 봐야 하죠.
Q. 방송 작가에게 꼭 필요한 역량이란 무엇일까요?
A. 정말 꼰대 같은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글을 얼마나 잘 쓰느냐’만이 전부는 아니에요. 그렇다고 인간관계만 챙기라는 말도 아니고요. 저는 작가로서 스스로에게 갖는 자부심이 가장 중요한 힘이라고 생각해요. 현장에서는 부당한 일을 겪을 때가 많아요. 그럴 때 가장 먼저 흔들리는 게 자존감과 자존심이에요.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무너지면 버티기 정말 힘들거든요.
사람들과 싸우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 권리를 버리면서까지 약해질 필요도 없어요. 대나무처럼 곧게만 서지도, 갈대처럼 아무 데로나 휘어지지도 않으면서 중심을 지킬 수 있으면 좋겠어요. 결국 나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오래갈 수 있어요.
Q. 마지막으로 방송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A. 아직도 방송은 많은 사람에게 낯설고 신기한 세계예요. 그래서 환상도 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도 분명 있어요. 일반 직장인이 겪는 고민부터 방송인만의 고민까지 범위가 넓고, 프리랜서 특성상 노동자로서 충분히 보장받지 못하는 부분도 많아요. 그런 부분들이 있다는 걸 알고 시작한다면 한결 수월할 거라고 생각해요. 조금씩 바꿔볼 수 있는 지점도 분명 있을 거고요. 미리 겁주는 거예요. 저도 꼰대인가 봐요(웃음).
방송국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 일을 선택했느냐"라고 물으면, 10명 중 8명은 "좋아서"라고 대답했다.
물론 다른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방송국은 맡은 일에 따라선 적은 연봉, 불규칙한 근무 시간, 프리랜서의 경우 불안정한 고용과 부족한 복지까지 고된 일 중 하나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번 '방송'의 꿈을 마음속에 품은 사람은 어디서든, 어떻게든 '방송'을 해내고야 만다. 그게 이해할 수 없는 방송의 매력인 것 같다.
나는 지금 방송 쪽에서 일을 하고 있진 않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 방송을 미련으로 남겨두고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 내게 의미 있는 일을 했던 것에 감사하며,
오늘도 꿈을 사랑하고, 의미를 찾아가는 모든 분들을 조용히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