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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아저씨와 퍼블릭 스페이스

진짜 공공 공간은 아무 쓸모도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는다. 제각기 원하는

by SUMMER

골드코스트행 비행기를 타고 A의 집에 도착했다. 이제는 두려울 정도로 눈부신 햇빛 아래 팜트리가 늘어선 휴양지. 우리는 화상을 입은 어깨를 긴 옷으로 가리고 캐리어를 끌었다. 새하얀 주택이었다. 개별 차고가 있는 1층을 지나서 복잡한 계단을 지나 올라가자 2층에 작은 가든이 있었다. 아파트는 한국의 우리집처럼 오래된 느낌이 있다. 타일로 마감된 바닥이 발에 닿는 느낌이 생경하고, 거실 중앙에는 팬이 돌아간다. 무척 더운 여름날이다 싶었는데 베란다 문을 열고 팬을 돌리자 거실에 금방 바닷바람이 분다. 베란다에서 바람이 드는 곳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어보면 건물 사이로 기적 같이 바다가 보인다.

며칠 묵을 여행 숙소라지만 그래도 마음을 쓰고 싶어서 바닥을 쓸고 닦았다. 본다이 정션의 쇼핑몰에서 사온 큰 수건을 바닥에 깔았다. 수건에는 서핑하는 개들이 그려져있다. 좌식 생활이 익숙한 사람으로서 수건을 깔아두니 눕고 앉고 할 때 마음이 한결 편했다. 짐을 푸니 후련하다. 어제 바닷가에서 입은 화상은 아직 고통스러웠고 가방을 멜 때마다 어깨가 따가웠다. 시드니에서 한 시간 반 거리라지만 공항으로 짐을 메고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는 이동이 고생스러웠다. 이곳으로 오는 국내선 비행기에서 끼무룩 잠이 들었다가 깼다. 비행기 창을 열어보니 끝도 없는 해안선이, 하얗게 이는 물보라가 보였다. 더 인적이 드문 가장자리. 그 자리를 찾아왔구나 싶다.

비행기에서는 제니 오델의 ‘How to do nothing’을 영어 텍스트로 읽었다. 여행은 누군가 공백으로 주어진 시공간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시험하는 자리 같다. 멀리까지 떠나와서 아무것도 안하기는 아쉽고, 주어진 여행 각본대로 무언가를 경험하는 건 어쩐지 허무하다. 그 사이에서 새롭고 낯선 환경에 고생도 하고 불안도 겪는다. 길을 잃는 일을 환영할 수 있는지, 시간을 일과로 채우지 않고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누릴 수 있는지, 여행이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 책에서 나오는 ‘비우고 없애는 일’에 대해 여행을 하며 다시 생각한다. 시간과 공간을 쪼개서 쓸모라는 레이어를 입히고 강박적으로 무언가하는 것. 여러 의미의 착취에 가까운데 착취가 이미 익숙하기 때문에 반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선 다른 힘을 써야 한다.

애인과 함께 여행을 오면 공공 수영장에 꼭 가본다. 애인은 해변가의 돌벽에 그냥 무심하게 박혀있는 샤워기를 보면서 감탄하고, 동네 공원에 50m 풀이 있는 수영장을 가보기를 좋아한다. 나는 그런 곳에 가서 그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같이 옷을 갈아입고, 아이와 가족들이 어떻게 오후를 보내는지 보는 게 좋다. 애인은 그 모든 게 공짜라고 좋아하고 나는 때로 ‘공짜 좋아하는 아저씨’라고 놀린다. 모든 곳에 상인이 있고 자릿세를 받는 공간은 질색이다. 누구나 누리고 그냥 비어있는 공간에 갈 때 가장 편안해진다. 호주는 그런 의미에서 맘 편해지는 공간이 많은 곳이다.

제니 오델은 이 반대에 놓인 걸 ‘Scripted space’라고 말했는데, 말하자면 각본이 있는 공간이란 뜻. 공공 공간인 척 하는 ‘가짜’ 공공 공간을 이렇게 부른다. 이런 곳은 사람을 배제하고, 어떻게 움직일지를 이미 설계해뒀으며, 돈을 내고 무언가를 누리고 나가는 동선을 기획해둔다. 돈 내는 소비자로만 존재하거나 그 공간의 경험을 위협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거나 둘 중 하나로만 위치하게 된다. 진짜 공공 공간은 아무 쓸모도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는다. 가짜 공공 공간처럼 무언가를 ‘더더’ 지불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설계되지 않는다. 제각기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내고, 경험하고 그 공간을 누린다.

좋은 도서관, 박물관, 공원, 수영장이 있는 도시에 가면 마음이 좋다. 당연한 듯 휠체어 출입로가 해변에 연결 되어 있고, 개가 해변을 뛰놀고 아이들과 노인들이 공원에 있는 풍경을 보면 안심한다. 아름다운 공공 도서관이 있는 도시에 가면 마음을 존중 받는 기분이 든다. 도로 표지판에 새겨진 프라이드 깃발이나 거리의 연인들이 하는 자연스러운 키스가 긴장을 풀어지게 한다. 이런 건 편리함이나 복지란 말과는 어울리지 않다. 편리함은 내가 아는 한국, 그 중에서도 서울에 더 어울리는 말이고 이런 건 좀 더 무심한 느낌의… 서로에게 당연하게 주는 존중 같다. 여행 중에 겪는 이 나라의 표면은 그런 느낌이다.

장을 봐와서 김치 라면과 루꼴라 시금치 토마토 샐러드를 먹었다. 마카다미아와 맥주도 두 캔. 별이 잘 보여서 별자리 구경을 하다가 적다.

진짜 공공 공간은 아무 쓸모도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는다. 가짜 공공 공간처럼 무언가를 ‘더더’ 지불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설계되지 않는다. 제각기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내고, 경험하고 그 공간을 누린다.

끝.

1월 30일 호주 여행 중. 씻고 장을 봐와서 쿠퍼 브루어리의 맥주를 마시면서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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