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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고자 장례식에 상주로 가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 나는 상주가 되어 보고 싶었다.

by SUMMER
“아까시꽃이 올해는 다 일찍 졌네요. 원래 이때면 꽃냄새가 가득하거든. 오늘은 바람도 한 점 없네.”

상조회사 해피엔딩에서 나온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남자의 말처럼 바람 없이 서늘한 늦봄, 듬성듬성한 꽃잎이 갈색으로 변해버린 아까시나무 아래에 우리는 서 있었다. 상조회사 직원 둘은 양복을 갖춰 입었다. 한 사람은 무연고 사망자 장례만 7년을 치러온 중년의 곽 선생님. 그 옆에는 천오식, 전주광, 임병호- 고인의 이름이 적힌 혼백을 들고 어설프게 상주 역할을 맡은 내가 있다. 화장 후 곱게 빻은 유골을 들고 장례의 마지막 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인의 이름은 가명으로 처리했습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 나는 상주가 되어 보고 싶었다. 무연고자의 장례식을 치러주는 제도가 있는데, 자원봉사를 신청하면 상주가 될 수 있다는 걸 어느 기사에선가 보았다. 죽음은 삶의 일부라는데, 나는 매끈하고 안락한 도시에서 죽음으로부터 격리되어 살았다. 장례나 제사와도 가깝지 않았다. 그런 걸 허례허식이라 생각했고, 시대 변화를 모르고 남아있는 착취적인 전통이라고 비판했다. 적개심에 가까운 마음이 있었다. 전 부치고 음식하고 준비는 다 여자들이 하는데 술을 올리는 건 왜 남자들의 몫인지. 그런 풍경에 화도 났고 이 오랜 의례를 우습게 보는 마음도 있었다. 상주가 되어보면, 얼굴 모르는 이의 장례를 치러보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배울 수 있을까? 그게 궁금했다.

오전에 함께 장례를 치르는 세 분 중 둘은 이 화장터의 동산에 유골을 뿌리고, 한 사람의 유골은 5년간 추모의 집에 봉안한다. 그 기간 안에 가족이 찾지 않으면 그도 이곳 유택 동산에 뿌려질 것이다. 우리는 곽 선생님의 장례 진행에 맞추어 보자기에 싸여 있던 유골을 조심스레 푸르고 세 번에 걸쳐 공동 유골함에 뿌렸다. 방금 화장터 가마에서 나온 유골은 손날이 데이게 뜨거웠다. 남은 유골을 모두 함에 붓고 이름이 적힌 종이를 불에 태웠다. 그로써 장례가 모두 마무리됐다. 나는 오늘 이름 모르는 다섯 사람의 상주로, 장례를 치렀다.

자원봉사를 신청하고 다음 날 전화를 받았다. 이 장례를 담당하는 시민단체의 간사였는데, 당일날 뼈를 보고 만지게 되는데 괜찮겠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 이유로 신청을 취소한 사례가 있었던 듯했다. 나는 괜찮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그 후 오히려 생각이 많아져서 화장장으로 향하는 날, 꿈에서 혼백이 수선거리는 목소리를 듣다가 깼다.

경기도에 있는 시립승화원까지는 한 시간 남짓 버스를 타야 했다. 부족한 잠을 버스에서 채우다가 승화원에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운구차가 가득했고, 입구 흡연구역에 사람이 많았다. 화장장 2층에 무연고자 장례를 치르는 빈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입구에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빈소이고, 누구나 들어와 추모할 수 있다는 설명이 적혀있었다. 몇몇 유족이 지나가다 멈춰 표지판을 읽었지만, 선뜻 빈소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곽 선생님이 혼자 나를 맞이했다.

“자원 봉사시죠? 지금 이게 바빠서..,. 잠깐 기다리실래요?”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그는 노트북과 씨름을 하고 있었는데 옆에 놓인 프린터기에서 A4 용지에 영정이 찌그러진 채 인쇄되어 나왔다. 그 사진을 접어놓고 그는 새 사진을 인쇄해 액자에 끼웠다. 제사 용기가 올려진, 꽃으로 꾸민 선반이 안쪽에 있었고, 그 위에 방금 뽑은 영정과 세 사람의 이름패가 올라갔다. 간단한 사무실을 겸하는 느낌인지, 작은 냉장고와 사무용품들이 바깥쪽에 쌓여있다. 바쁜 일을 끝낸 뒤 곽 선생님이 시원한 박카스를 하나 건넸다. 상조회사 해피엔딩의 두 사람도 들어왔다. 곽 선생님은 작고 체구가 단단한 인상의 한 남자를 ‘바리톤’이라고 소개했다. 그 이유는 장례가 다 끝나면 자연스레 알게 되실 거라며 웃었다.

첫 번째 장례는 9시 20분에 시작했다. 세 분을 모셨다. 영정이 있는 분은 한 분뿐이었는데, 들어보니 사진이 있는 경우가 열 중에 한둘이 될까 말까 한다고 했다. 그나마도 양복을 얼굴에 합성한 것인지 사진 어딘가가 좀 어색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털어놓았더니, 곽 선생님은 당연하다는 듯 다 말씀드릴 테니 상주 자리에만 있어 주면 된다고 했다.

장례는 물 흐르듯이, 차례를 지켜 진행됐다. 처음엔 고인의 생애를 짧게 소개하는 말로 시작했다. ‘000 씨는 1954년에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고, 마지막 거주지는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이었으며 0월 0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 정도의 설명이 전부였다. 묵념하고, 향을 피운 후 헌주를 했다. 그 후 절을 두 번 반. 삽시정저라고 해서 제사상의 밥뚜껑을 열고 수저를 밥에 꽂았다. 고인들이 식사하시기를 기다리며 잠시 묵념을 한 뒤 숭늉을 상에 올려 헌수를 했다. 돌아가며 네 사람이 헌화를 하고,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추도사 낭독을 위해 바리톤 선생님이 가운데 섰다. 왜 그를 바리톤이라고 부르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에 담은 추도의 말은 울림이 있었다.

“버거운 삶 뒤로 하고, 고이 잠드소서.”

관을 운구하고 수골하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90분 정도. 쉬는 시간에 믹스 커피를 타 먹으며 곽 선생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눠보니, 젊었을 때는 노동 현장에서 민주시민교육을 했다고 했다. 그 시절, 선생님과 노동 운동을 하다가 분신해서 죽은 친구들도 많다. 지금까지도 매해 만나서 친구들과 추모제를 열고 있다.

내게 뭐하는 사람이냐 물으셔서 작가 지망생이라고 했더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넨다. 경기도 안산에 배터리 공장에 화재가 났는데, 거기서 난민들이 많이 죽었다고. 오늘 저녁에는 고공 농성하는 현장에서 문화제가 열리는데 그런 이야기도 좀 들어보면 어떠냐고.

곽 선생님이 이 활동을 한 건 2018년부터다. 시작할 당시에는 시민단체에서 먼저 무연고자 장례를 치르기 시작했고 이후 서울시 조례가 생겨서 지원금을 받게 됐다. 첫해 6백여 명 장례를 치렀는데, 작년에는 천 사백 명 장례를 이 작은 빈소 하나에서 치렀다. 무슨 마음으로 이 일을 하시냐 물었더니 답이 간단하다.

“한 사람이라도 있어 주면 좋잖아요. 덜 외롭고.”

막연히 무연고자라 하면 노숙 생활자가 대부분일 거라 생각했다. 그는 내 말을 듣고 그런 경우가 한 삼분의 일이고 다른 경우도 많다고 했다. 기초수급자인데 몸이 안 좋아서 요양병원에 국가 지원으로 입원해 있다가 사망하는 경우. 집에서 고독사 후 발견된 경우가 있다. 앞서 장례식에서 고인 소개를 할 때 사망 시기가 한 달 이상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어서 의아했는데, 그런 연유였던가 짐작했다.

무연고라고는 하지만 수소문해보면 가족들이 있는 경우가 7-80프로인데, 연락이 끊긴지 삼사십년 된 경우도 있어 연락을 받고 고민 끝에 시신 인수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들에게 답을 받기까지 한참이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끝내 시신 인수를 거부했지만, 화장터에 결국 찾아 와서 울다 가는 가족도 있었다. “집집마다 말하기 어려운 사정 하나씩은 다 있잖아요.” 곽 선생님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아꼈다.

오후 장례까지 마친 후, 화장장의 다른 곳들을 둘러 봤다. 1층에서부터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망자의 시신이 화장 되는 광경을 유리 너머로 보면서, 회한과 그리움, 슬픔과 화를 담은 울음을 터뜨린다. 누군가의 언니. 누군가의 아내. 아버지. 아들. 친구. 동료. 사랑하는 이. 제각기 다른 사연이 있다. 제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상복을 입은 여섯 살 남짓 남자애가 복도를 뛰어다니다 아빠에게 달려간다. 큰 언니를 잃은 자매들이 언니가 유산으로 남긴 뜨개실을 어떻게 나눌지 상의한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죽은 자가 남긴 것을 떠올리고 나누고 간직한다. 결국 장례는 죽은 자가 아니라 남은 사람들을 위한 의식일지도 모른다. 숨이 멎는 그 순간, 삶이 끝나버렸다는 허망함을 지워 보려는 것이다. 당신을 보내는 중이라며, 잠시 이별을 유예하고 못다한 말을 건네 본다.

그렇다면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을 위해, 낯선 사람들이 치러주는 장례식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함께 나눈 추억도, 일면식도 없는 고인이다. 아는 것이라곤 출생지와 사망지, 사망한 날짜와 이름 정도. 바리톤 선생님의 추도사를 들으며 처음엔 의아한 마음도 있었다. “영영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운명이지만, 이렇게 보내드리기가 아쉬워 술 한 잔을 올립니다.”

모르는 사람과의 이별을 아쉬워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의심이 우습게도 ‘버거운 삶을 뒤로 하고 고이 잠드시라’는 마지막 인사에 진심으로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났다. 내가 아는 것은 그들의 이름뿐이지만, 살아온 시간이 버겁고 어려웠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정도의 작은 사실로도 연결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같은 것 하나 없는 삶이래도, 삶이 막막하고 버거웠을 어느 순간의 마음을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마음으로 이 일을 하시냐 물었더니 답이 간단하다. “한 사람이라도 있어 주면 좋잖아요. 덜 외롭고.”

끝.



글쓰기 모임에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해보라’는 과제를 받고 쓴 글입니다.

무연고자 공영 장례식 지원 봉사활동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1365 봉사활동 포털에서 ‘무연고자 공영 장례’를 찾아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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