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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작가 Apr 20. 2021

백수가 되고 처음 받은 실업급여

퇴준생 보고서 26 - 월급이 있다 없으니까

[Web발신] 구직급여 --------원 OO은행 입금되었습니다.

백수가 되고 첫 실업급여를 받았다. 아직 전 달 월급도, 퇴직금도 들어오기 전인데 실업급여는 빛보다 빠르게 입금되었다. 감격스럽고 행복한 나머지 문자 메시지를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오로지 '구직급여'라는 네 글자만 내 눈에 스쳤을 뿐이었다.

은행 앱부터 켰던 나는 통장잔고를 확인하고 급히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결국 인터넷 창을 켜 검색어를 입력했다.

"1차 실업급여 액수"




사진 참조 : 픽사 베이

퇴사하고 처음 맞는 월요일이었다. 출근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에 느지막이 현관을 나섰다. 고용센터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거리는 그리도 한적하더니, 고용센터 안은 전쟁터처럼 시끄럽고 정신이 없었다. 어마어마한 인파에 새삼 놀랐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퇴사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니...

귀찮은 표정의 직원은 퉁명스러운 말투로 이것저것 요구하고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아직 회사에서 이직확인서도 제출하지 않은 상태였다. 직원은 내게 종이 몇 장을 쥐어주며 다 쉰 목소리로 뭐라 뭐라 일러주었다. 제대로 못 들었지만 대충 '설명서에 다 적혀있겠지'라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사한 사람들 실업급여를 처리해주는 일을 하려면 얼마나 부럽고 짜증 날까'

평소라면 직원을 귀찮게 했을 테지만, 어쩐지 동정 어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이렇게 들뜨고 행복한데, 저 사람은 나를 보며 얼마나 부러울 것이냔 말이다. 이 바쁘고 지치는 월요일에, 억지로 몸을 끌고 일어나 회사에 와서 퇴사한 사람들을 마주하다니... 엄청난 정신력을 요하는 업무 같았다.


사진 참조 : 픽사 베이

먼저 퇴사한 사람들에게 실업급여 신청이 좀 귀찮다는 얘기를 들었어서 걱정했다. 허나 실제로 설명서를 읽고 후기 좀 찾아보니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1차 실업인정 신청 당일날 아침에 부랴부랴 처리하느라 고생 좀 했지만. 문서 다운 받고 어쩌고 하라더니 동영상만 들으면 되는 일이었다. 괜한 뻘짓을 하느라 겨우 시간에 맞춰 전송할 수 있었다.

좀 번잡스럽고 귀찮았지만, 출근에 비하면 이 얼마나 편리하단 말인가.

그저 동영상을 보고 전송 버튼만 클릭하면 된다. 피로에 쩔은 몸뚱이를 이끌고 사람 부대끼는 지옥철과 버스를 타면서 출근을 하지 않아도 통장이 채워진다니. 엉엉 울면서 노비 짓을 하지 않아도 월급을 받을 수 있다니. 싫어하는 사람 얼굴 마주 보고 욕 참지 않아도, 집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려도 돈이 들어온다니!

아, 물론 아는데요. 실업급여가 열심히 취직 준비하라고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거지, 맘 편하게 놀라고 주는 돈 아니라는 거 알긴 하는데요. 다들 그렇잖아요? 고생한 기간만큼 좀 쉬어도 되는 거잖아요? 어차피 돈 떨어지면 다시 몸뚱이 붙들고 출근해야 하는데, 이 기간 정도는 편안하게 보내도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액수의 상태가?

사진 참조 : 픽사 베이

그러고 보니 첫 실업급여는 좀 적을 거라던 후기를 듣긴 했다. 그런데 퇴사하는 사람 귀에다 대고 뭐라고 말한들 그게 들릴 리가 있나. 까마귀 고기를 먹은 나는 급기야 '잘못 처리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적어도 그렇지, 이거 나만 너무 적게 들어온 거 아닌가?' 싶어서.

네, 아니었습니다. 혹시라도 실업급여 처음 받으시는 분들, 당황하지 마세요. 첫 실업급여는 8일 치만 산정되는 게 맞고, 2차 실업급여부터 28일 치가 산정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차 실업급여는 액수가 너무나도 적은 게 정상이라는 사실.

그런 줄도 모르고 장바구니에 한가득 담아놓았던 물건들. 돈 없을 때 다시 보니 쓰잘데기 없기 그지없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장바구니를 탈탈 털어서 비워버렸다. 장바구니는 그렇다 치고. 일이 이리될 줄도 모르고 신 나서 줄줄이 잡아놓은 약속들은 어쩔 것이냐. 어찌할 도리가 없이 나는 비상금을 꺼내야 했다.


퇴사하자마자 돈이 없어서 비상금을 꺼내 쓰다니.

경제적인 타격보다 정신적인 타격이 컸다. 돈을 쓰는 습관이야 고치면 그만이다. 씀씀이도 돈 없으면 저절로 줄기 마련이다. 돈이 없으면 저절로 자린고비가 될 터이니. 다만, 월급을 받는 생활을 하다가 월급이 없는 생활로 돌아오니 몽롱했던 회사생활에서 이제야 깨어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아, 분명 실업급여 기간이 끝나면 허덕이겠구나. 다시 일자리를 구하겠구나."
사진 참조 : 픽사 베이

많은 이가 힘들게 조직에서 빠져나와도, 끝끝내 제 발로 조직에 돌아가게 된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데, 거지 같은 조직 생활을 하지 않으면 돈 들어올 구멍이 없으니까. 숭숭 빠져나가는 돈을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 차가운 현실이 살갗에 와 닿았다. 이게 현실이구나. 사회 시스템 자체가 꿈보다 돈에 맞춰져 있다. 그러니 돈을 벌려면 일단 어디든 붙여주는 곳 감지덕지하며 들어가게 된다. 돈 때문에 지옥을 다니다가 지쳐서 나오면 또 다른 지옥이 펼쳐진다.

언제쯤 돈 걱정 없이, 그냥 순수하게 하고 싶은 것에 매진할 수 있을까.

실업급여와 퇴직금으로 연명하는 단기적인 기간 말고. 장기적으로 꾸준히 내 꿈과 열정에 투자할 수 있는 여유는 언제쯤 찾아오는 걸까. 언제나 돼야,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자기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까. 씁쓸했다.




고작 1차 실업급여를 받고서도 막막하다. 몇 개월 뒤에는 다시 울며 겨자 먹기로 생계를 위해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칭얼거렸던 도서관이라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돌아갈지 모를 일이다.

사진 참조 : 픽사 베이

그래서 내가 퇴사하며 결심했던 것은, 적어도 내가 돈 때문에 일을 하게 될 때 넓은 선택지 안에서 고를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일했던 곳밖에는 갈 곳이 없어서, 혹은 말단 사무직 말고는 할 일이 없어서 나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짓만큼은 피하고 싶다. 취업도 또 다른 도전이 되고, 직장생활이 또 다른 경험이 될 수 있도록 내 분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1차 실업급여를 받고 내가 느낀 것은 그렇다.
남은 기간은 취업의 선택지를 넓힐 수 있는 기간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점.
당장은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벌지 못해도,
천천히 방향을 틀어서 나아갈 필요는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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