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옆 미용실 앞에서 초등학생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미용실 사장님의 귀여운 꼬마 아이들. 가끔 보일 때면 몰라보게 쑥쑥 자라나 있어 놀라곤 한다. 이제 여름방학이 시작됐나 보다. 폭우와 무더위, 열대야가 한창인 걸 보며 '이쯤이면 방학이려나' 생각했었다. 학교를 벗어난 지 오래인데다 아이가 없으니 주변 환경의 변화로 시기를 가늠한다. 그나저나 요즘 초등학교 아이들은 이 신나는 방학을 어떻게 보내고 있으려나.
나의 초등학교 방학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반복되다가 벼락같은 일기 몰아 쓰기로 끝이 났다. 매일의 등교와 정시를 알리는 종소리로부터의 해방. 지금까지도 규칙적인 생활을 힘들어하는 내게 방학은 행복의 시작이었다. 우리 집은 농사를 짓지 않아서 논이며 밭이며 불려 다니지도 않았다. 하루는 온전히 내 것이 되었고, 우리 부모님은 자식이 뭘 하든 그대로 내버려두셨다. 1990년대 초 여느 촌 동네 가정의 흔한 풍경이었다.
하루는 언제나 비슷했다. 나는 아빠의 출근 시간에 맞춰 부스스 일어났다. 오전 8시, 12시, 오후 6시. 밥은 때를 맞춰 같이 먹는 게 의무였던 터라 눈곱이 가득한 채로 밥상 앞에 앉아야 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본격적인 하루의 시작이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동생과 놀거나 책을 읽었다. 선풍기를 바로 앞에 틀어 놓고 엎드려 있으면, 곧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그땐 어째서인지 매일매일 심부름이 있었다. 누구누구 집에 뭘 가져다주고 와라. 시장에 가서 콩나물을 사와라. 아빠가 서류를 가져다 달란다. 더우니까 마당에 물 좀 뿌려라... 엄마는 꼭 가장 재밌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심부름을 시키는 것 같았다. 나는 매번 작은 반항을 해보지만 '습!' 혹은 '빨리 갔다 와!' 한마디면 끝이다. 그렇게 어영부영 3시간이 지나면 다시 점심시간이다. 잠시 집에 들른 아빠와 함께 점심을 먹어야 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집을 나설 시간이었다. 동네로, 뒷산으로, 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가 친구들을 만났다. 촌 동네라 아이들이 많지 않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 어울려 놀았으니 친구는 충분했다. 축구, 야구, 술래잡기, 땅따먹기, 역할놀이, 모래놀이, 늑목, 정글짐... 늘 하던 놀이라도 지루하지 않았다. 다들 여름 무더위 따위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소리 지르며 뛰어놀았다. 정신없이 놀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여섯시가 되면 엄마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름이 불린 아이는 인사를 나누고 바삐 무리를 빠져나갔다. 나도 그렇게 엄마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할 일 없이 뒹굴뒹굴하다 아빠가 사 온 수박을 먹었다. 식구들과 붙어 앉아 드라마를 보고. 방에 돌아와 동화책이나 과학만화, 위인전을 읽고 동생과 놀며 싸우며를 반복했다. 그러다 졸리면 아무 때나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같고도 다른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매일을 재밌게 놀다 보면 저 앞에서 개학이라는 무시무시한 놈이 손 흔들며 다가왔다. 선생님이 주신 방학 숙제와 일기를 해결해야 했다. 방학 숙제 정도는 서두르면 하루 이틀 만에 쓱싹 해치울 수 있었다. 문제는 단 하루도 쓰지 않은 일기였다. 예나 지금이나 지나간 날은 쉽게 잊혀 버렸고, 나는 머리를 박박 긁으며 짧은 인생 최대의 사투를 벌여야 했다. 엄마의 기억을 빌려 보려는 바보 같은 짓을 하다가 일기를 미뤄둔 게 발각되어 혼나곤 했다. 사실 내용이야 무슨 말이든 지어내서 줄을 채우면 그만이었다. 선생님이 내가 뭘 하고 지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정말 곤란했던 건 날씨였다. 날씨를 잘못 기록했다가는 선생님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기상청 직원도 아닌데 왜 그날의 날씨를 기록해야 하는지 분노하면서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근처에 있는 외갓집에 가서 모아둔 신문의 날씨를 옮겨 적거나, 세 살 어린 동생의 일기장에서 날씨를 훔쳤다. 그래도 안되면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아무 날씨나 적어버렸다. 그렇게 며칠 사이 한 달 반의 방학 일기를 완성했다. 개학을 하고, 긴장을 잔뜩 하며 일기장을 제출했다. 이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걸로 보아 선생님은 날씨 따위 신경도 쓰지 않으셨었나 보다. 나는 일기를 써야 하는 초등학교 방학 내내 이런 짓을 반복했다.
옛 생각의 밀물에 이야기가 두서없이 길어졌다. 나와 같이 90년대를 보낸 아이들은 어느새 밖에 있는 아이들의 부모가 되었다. 저 아이들도 우리처럼 방학 동안은 자신만의 온전한 하루를 갖게 되었을까. 하루가 왜 이렇게 짧지 하며 재밌게 지내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요즘도 방학 동안 일기를 써서 학교에 제출하고 있을까. 나처럼 푹 묵혀두었다가 후다닥 일기를 몰아 쓰고 있을까. 안 그랬으면 좋겠다. 일기가 숙제가 되거나,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검사받아야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별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는 방학을 보냈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그래도 괜찮다. 지난날의 우리처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