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RESQUE Jan 16. 2019

이 영화의 제목은 읽는 게 아니다
日日是好日

차 한 잔의 계절, 하루와 하루의 계절


日日是好日, 일일시호일, 일본어로 읽으면 니치니치코레코지츠. 모르는 한자도 아닌데, 굳이 말하면 기본 중 기본인데, 이 제목을 읽지 못했다. 다실 창으로 흘러내리는 햇살 속 다소곳이 앉은 두 여성을 보고, 다도에 관한 이야기라 얼추 짐작은 했을 뿐, 제목의 뜻을 생각한 건 함께 영화를 본 오랜 지인의 질문 덕택이다. 하루, 하루, 좋을 호에 날, '시'는 이꼴', 나는 울퉁불퉁한 말을, 얼버무려 답인 듯 전하고 말았다. 사실 이 영화를 알게 된 건 지난 해 겨울 도쿄에 갈 준비를 하던 무렵이었고, 감독이 오오모리 타츠시란 사실에 노트에 적어놓았다. 아마도 카고시마에서, 유일하게 읽을 수 있었던 제목, 카타카나의 '세토우츠미(セトウツミ)'를 유카타 차림으로 보았다. 오사카 강둑을 배경으로, 대사의 태반이 만담 형식을 취하는 영화엔 이케마츠 소스케와 스다 마사키의 시시껍지 않은 말들이 흘러 넘친다. 영화의 8할 이상이 사투리와 줄임말, 신조어라 내가 건진 건 고작 한 줌 정도의 말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저 따분하고 지루하다 투덜대는 청춘의 여름이 좋았다. 좀처럼 강둑을 벗어나지 않는 프레임 속, 웬만해선 달라지지 않는 투 샷의 앵글, 한정된 세계에서 애잔하게 드러나는 강물 한 줄기와 같은 청춘이 좋았다. '세토우츠미'는 세토(스다 마사키)와 우츠미(이케마츠 소스케)의 '세토우츠미'이고, 그만큼 영화는 작고도 작고, '일일시호일'은 왜인지 다섯 글자다. 강둑의 말들이 환기하는 청춘이란 시간, 다실의 다다미가 은유하는 하루와 하루의 시간. 다도 교실을 처음 방문한 노리코(쿠로키 하나)와 미치코(타베 미카코)의 눈 앞으로 그저 평펌한 다섯 글자 '日日是好日'가 펼쳐졌을 때, 나는 왜인지 그냥 울고 싶었다.  

영화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길'을 은연중 던지며 시작한다. 엄마와 아빠, 셋이서 영화를 보고 돌아온 노리코는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알 수 없다'고 불평하고, 노리코는 그저 디즈니 랜드에 가고 싶었다. 아마도 열 살 조금, 엄마 아니면 아빠가 골랐을 영화. 그렇게 너무 빨리, 아니 잘못 도착한 페데리코 펠리니. 영화는 대부분 다실에서 펼쳐지고, 차를 마시며 흘러가지만, '일일시호일'은 노리코의 성장기이고, 노리코와 미치코의 청춘 이야기이다. '세토우츠미'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츠다 류헤이와 에이타가 콤비로 등장하는 '마호로역 타다 심부름 집'이 그랬던 것처럼, 오오모리 타츠시 감독은 다시 한번 청춘의 뜰에서 밖을 내다본다. 좋고 싫은 건 물론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잘 알지 못하는 노리코와 무엇이든 확실하고 명료한 미치코. 밤과 낮이거나 겨울과 여름인 듯한 둘. 미치코는 무역 회사에 취직해 휴가에는 하와이로 여행을 가고 퇴사라는 거사도 별 고민 없이 결정하지만, 노리코는 자꾸만 문턱에서 넘어지며 머무르지 못하는 아르바이트의 시간을 산다. 정반대인 듯 싶어도 어느 클래스 어디에도 있을 법한 둘. 함께 다도 수업을 시작했지만 다도의 시간이 더 오래 머무르는 건 노리코의 자리이며, 노리코의 시간은 어쩌면 다도의 세계와 그리 멀지 않다. '세상에는 금방 알 수 있는 것과, 바로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어쩌면 노리코가 찾지 못한 '길'이거나 영화가 품고있는 삶의 풍경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까지, 노리코와 미치코는 그저 아픔을 살고 작은 기쁨을 산다. 그렇게 '일일시호일.' 세상엔 읽는 게 아닌 보아야 하는 그림같은 글자가 있다 .

영화에서 다도란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건 '인사(お辞儀)'가 이상하다는 다도 선생님 타케다(키키 키린)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일본에서 다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고, 어느 가정이든 차를 우려 간단한 휴식을 취하지만, 사실 다도의 이모저모를 속속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찻잔을 닦기 위해 ゆ자를 쓰고, 잔에 차를 넣기 위해 사용하는 스푼에 차샤쿠(茶杓)란 이름을 붙이는 다도는 어김없이 현실과 다른 언어의 시간 속에 있다. 앞뒤가 뚜렷한 미치코가 자꾸만 던지는 '왜'라는 물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영화에서 웃음이 흘러나오는 건 좀처럼 능숙해지지 못하는 학생들의 서툰 동작에서이고, 다도는 배우는 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다. 習う와 慣れる. 나라우와 나레루. 타케다, 아니 키키 키린이 이 대사를 읊었을 때 일상에 가려있던 삶의 기운이 조심스레 흘러나왔다. 일본어는 어쩌면 자연을 닮았는지 소리로 의미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고, .다도는 형식을 만든 뒤 마음을 담는 것, 노리코는 찬 물과 따뜻한 물의 소리 차이를 몇 번의 계절이 지나간 뒤 알아차린다. 입춘이 가장 추운 건, 바보같지만 빨리 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만들어낸 다소 억지의 말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같은 시간, 같은 자리, 같은 장면을 무수히 반복한다. 하지만 매번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차가 어느 한 번 같은 맛이었던 적은없고, 매일은 매일이고, 매일이 아니다. 아빠가 세상을 뜨고, 하늘에선 진부하게 세찬 비가 쏟아지고, 그렇게 하늘이 눈물을 흘리던 날, 노리코의 아빠는 바다에서 인사를 하고있다. '바로 알 수 없는 건 시간을 갖고 알게 된다'는, 아마도 다도의 시간인 듯한, 뒤늦게 도착한 문장이 지나가고, 노리코가 '이제야 '길'을 알 것 같다'고 말했을 때, 나는 시간을 믿고 싶었다. '일일시호일'은 어떤 궂은 날도 품어내는 바다같은 시간의 영화다. 문을 7부만 열고 들여다 본 다다미의 시간, 그곳엔 아직 오지 않은 또 하나의 '호일(好日)'이 숨어있다. 그러니까 '일일시호일', 인생은 계절처럼 흐른다. 세상엔 보아야 하는 영화 제목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이 되어 끝나버린 그의 계절,  LETO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