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의 배덕감
도대체 무슨 일이야.
오늘은 심화 조향 수업의 마지막 날, 아침 일찍 눈을 떠 몸단장을 하고 마음 단장을 하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맞춰 나왔다. 두 달간의 여정의 마지막 날인만큼, 작은 시험도 새로이 향수도 개발해야 하는 날인데 도착 5분 전 공방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얼마 전 새로 산 구두와 시계,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 딱 기분 좋은 만큼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이 모든 것들은 완벽한 하루를 시작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오늘 수업에 참석할 수 없다고 문자를 보냈다. 두 달 여정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는 곧장 근처의 스타벅스로 들어왔다.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이 가득 차있었고 각자의 주말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책을 읽거나 가족끼리 나와 수다를 떨거나 넷플릭스에서 하는 최신 드라마를 보거나 말이다.
오늘 수업을 땡땡이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너무 완벽한 날씨 때문이기도 하고, 새로 산 시계 때문이기도, 또각대는 구두 소리가 좋아서 이기도 하지만, 사실 마지막 수업에 대 대한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 좋아하는 조향 수업의 마지막 '내 향수 개발'을 하지 못했다. (덤으로 디플로마를 치르기 위한 공부도 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오후에 있는 다른 미팅들 준비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려고 했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았고 이것은 일종의 배덕감이 아닐까? 하고 커피 그라인더에 갈려 나오는 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죄책감과 배덕감 따위가 얼른 갈려서 사라지기를 바랐다.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약속을 취소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나는, 자꾸 미루는 병?에 걸렸다. 미루는 병이라고 칭하고 변명이라고 읽기로 하자.
몇 달 동안 운이 좋게도 끝도 없이 외주 일들이 밀려오고 있고, 하나하나 처리해가고 있지만 최근 추영준이라는 이 사람은 본인을 하루하루 배신하기 바쁘다. 평소라면 2-4시간이면 끝낼 일을 며칠이나 잡고 있기도, 몸과 마음의 예열을 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유튜브를 한 시간씩이나 책상에 앉아서 보고 있다. 그러면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데, 새벽 1시면 곯아떨어지는 이 몸뚱이를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그렇다. 지금도 글을 쓰기보단 준비하고 일을 해야 하는데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얼마 전 TV에서 오은영 박사님이 이러한 사람들은 완벽주의 성향이라서 그렇다는 말을 했었고, 그것에 대해 한편으로는 공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게을러지는 부끄러운 나 자신을 감추는 핑계로는 역부족이었다. 실력도 부족하고 센스도 부족한 나의 최대 장점은 '성실함'인데 이 무기마저 사라지면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하나... 참으로 배부른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스스로에게 또 따끔한 한마디를 보내고 싶다.
- '정신 차려 이 새끼야.'
가장 중요한 것을 미루는 습관은 아마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고1 여름방학 입시미술을 시작하며 기본기를 다지고 어느 정도 입시반 수업을 들을 때에부터 생긴 이상한 버릇이 있는데, 그것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제일 마지막에 처리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부족할 때 나오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던 한 두 번의 경험 때문인지 이 버릇은 학원에서 하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 *빠따(10여 년 전에는 학원에서도 체벌을 했다.)를 맞을 때에도 고쳐지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 회사에서 일을 할 때에도 그러고 있다.
초인적인 힘이라는 경험은 아주 적은 핑계고, 사실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망칠까 내 실력에 대한 불안감이 대부분의 원인이었다. 따지고 보면 계획대로 성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인생인데, 실패하며 배우고 단단해진 것이 나라는 사람인데 뭐가 그렇게 아직도 무서운지 모르겠다. 어떤 실수를 해도 이제는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당황한 티 조차 내지 않을 만큼 뻔뻔함이라는 가면도 갖추고 있는데... 그 가면을 너무 자주 써서인가 그 뒤에 감춰진 불안한 얼굴은 전보다 더 어두워져가고 있다.
불안한 이 얼굴을 어떻게 감추나... 하고 고민하던 찰나.. '띠링!'하고 조금 전 '하움'이라는 어플에서 오늘의 글귀가 전송되었다.
'우리는 과거에 머물면서 과거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충실함으로써 과거를 치유한다.' 마리안느 윌리엄슨의 말처럼 일요일 오전의 핑계쟁이는 이제 얼른 보내주고 일요일 오후의 성실한 사람이라는 오래 묵혀두었던 또 다른 가면으로 새로이 주말을 시작하기를 바라본다.
자, 이제 얼른 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