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으로 익숙해지기를 바라며
또 이맘때즈음 돌아오는, 아니 조금은 늦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가.
2024년이 벌써 반이나 지났다. 만 나이로 바뀌고 난 뒤 오히려 나이에 대해 무감각해져 버린 나 자신을 발견한 것도 이젠 그리 어색하지가 않다. 2023-24년은 정말 생각도 없이 많이도 놀았다. 술과 춤에 빠져 신나게 놀았다. 몸을 움직이며 하나씩 동작을 배우고 그것을 익히고 사람들 앞에서 공연도 했다. 하고 싶던 동작들을 새로 배우는 것은 신나기도 했지만, 그것을 학습하고 연습하는 시간들은 실로 불편하고 힘든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행위는 특히 내가 잘 못하는 것을 습득하는 행위는 꽤나 큰 스트레스를 동반하고 그것을 습득했을 때에는 그를 넘어서는 성취감에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즐겁지 않은 것을 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 언제나 어렵다. 거절당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은.
얼마 전 대표님 부친상 소식에 회사에서 빌린 차량으로 급하게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가는 길은 3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먼 길이었고, 차량에 탑승한 사람들은 대부분 직급이 높은 부장, 팀장급들이었다. 최근 들려오는 승진에 대한 귀띔에 대한 영향도 있었지만, 슬픈 일에는 꼭 함께해야지 라는 생각이 특히나 강해지는 시점이라 직급이 낮은 상황임에도 지원하여 대구로 향하는 길로 올랐다.
한 시간 반이나 지났을까 불편하게 잠을 자다가 깬 곳은 괴산 휴게소였다. 담배를 하나 태우고, 화장실에 들른 후 조금 허기를 느껴 꽈배기를 하나 주문했다. '설탕도 잔뜩 묻혀주세요.'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입 크게 베어 물고 버스로 향하는 중, 유니세프 자원봉사자가 스티커를 붙여달라고 다가왔다. 마침 시간이 조금 남아서 스티커를 붙이고 이야기를 듣던 중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물을 사서 후원해 달라는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나는 적당히 거절한 뒤 버스로 돌아왔다.
그 뒤 장례식장에서의 이야기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었다. 조의를 표하고 평소 일로 만났던 상사들과의 가벼운 식사와 커피 시간을 거친 후 오후 11시가 되어서야 서울로 도착했다.
며칠 후 여자친구와 점심을 먹으러 가던 중, 유니세프 자원봉사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 유니세프 자원봉사자들은 스펙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이 시간에 충분히 다른 좋은 일들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 준아,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은 세일즈와 결국 같아. 누군가에게 판매를 하는 것은 우리가 회사를 다니는 이유와 같을 거야. 이 사람들은 그래도 사람과 대하면서 아주 많은 거절을 경험할 거야. 그리고 그 경험은 아주 큰 경험이지.
단순하고 간단명료하며, 묵직한 말이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부끄러운 감정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고자, 조금씩 곱씹다가 이렇게 글을 쓰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별거 아닌 이야기들이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릴까, 지금 내가 가장 두려워하고 하기 싫어하는 것이 무엇일까, 거절당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춤을 배우고 출 때에 춤을 추는 기회가 아니라, 춤을 추면서도 함께 추는 파트너에게 거절당할 때가 있다. 남자는 리더(춤을 리드하는 것은 남자의 역할이고, 99% 남자의 리드로 소셜댄스는 출 수 있다.)로서 춤을 리드해야 하는데, 이 동작이 명확하지 않거나 상대방에게 맞추지 않으면 팔로워(리드를 받는 여자를 이야기한다.)가 리드하는 동작을 받지 않는다. 이것 또한 의도와 상관없는 거절이다.
춤을 시작한 지 2년을 꽉 채워가지만,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게 더 극명하게 나눠져 갈래를 달리하고 있다. 내가 배우는 춤 중 살사는 파트너가 패턴을 받지 않거나, 못 받을 때에는 다른 동작인 것처럼 상대방에 맞춰 넘기는 동작이 가능할 정도로 즐기고 좋아하는 단계가 되었다. 반대로 바차타의 경우에는 나의 실력과 상관없이 상대가 받지 못하는 패턴 하나하나에 몸이 움츠러들고, 머리가 백지장으로 변하며 공포감으로 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한심하기도 하고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여자친구, 함께 연습하는 파트너들에게 지적을 받는 것은 당연한데 이럴 때마다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기분이 상해버리는 스스로에 대해, 큰 실망이 이어져 간다. 계속해서 이러한 상태를 함께 춤을 추는 여자친구에게도 이야기했고, 여자친구는 항상 나에게 강요하지 않고 정답을 이야기해 줬다. 상대를 바라보고 기다리고, 그러기 위한 자세로 기본 동작을 정확히 하고 하나하나 해보자고. 그렇게 해서도 즐겁지 않다면, 하지 말라고. 즐겁고 행복한 것만 하기에도 인생을 짧지 않냐고.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부끄럽고 그와 동시에 다시 해보자!라는 마음이 고양감으로 변해 올라오기도 하지만, 이런 패턴이 반복될 때마다 고양감의 발화점은 높아지고, 식는 점은 더 낮아져가고 있다. 자기혐오와 자기반성 부끄러움을 소화하고 삼켜야겠다는 어설픈 다짐이 이제는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그럼에도 움직여야지'라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움직일까'라는 조금은 더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하고 나아갈 필요성을 느낀다.
그럼에도 지적 한 번에, 거절 한 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릴 이 쿠크다스 같은 멘탈에 강철 같은 마스크를 잠깐씩 씌우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방법은 시간이나 횟수에 제한을 걸어두고 명확한 기간을 참고 넘어가는 것으로 말이다. '30분 이내의 거절은 모두 웃으며 받아낸다.' '3번의 거절은 일단 웃으면서 넘겨보자.'
이렇게 하나씩 넘겨가다 보면 또 조금씩은 나아진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