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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ize Impact Apr 12. 2021

젊은 아가씨가 얼굴이 그래서 어째요

젊은 아가씨가 얼굴이 그래서 어째요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나는 이 소리를 몇 번이고 들었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듯 그랬고, 오래간만에 보는 친척들이 그랬고,

가끔은 나와 가장 가까운 엄마, 아빠도 그랬다. 

가까운 이들에게 듣는 이런 말은 속상한 마음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 그냥 툭 던진 것이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그런 소리를 전처럼 듣진 않는다.

개인의 속사정에 대해 함부로 개입하는 것이 실례가 된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듯도 하고,

더욱이 이제는 내가 '젊은' 아가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이 삼십 대 중후반을 넘어가면 자연스럽게 거둬지는 어떤 시선들이 있다.

여성이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떤 지점에서는 일상이 전보다 아늑해진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시야 밖에서 사라진다고 하지만, 애초에 여성들이 그런 시야를 원하긴 했는지 반문하고 싶다)


느닷없이 나의 개인적인 영역에 개입되는 이런 말들에 마음이 서러웠다 하소연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외모에 영향을 미치는 누군가의 질병을 염려하는 소리에 '젊은 아가씨가~'라는 수식이 따라오는 아이러니... 그리고 그런 표현이 왜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조용히 수용해오기만 했던 지난 내 모습이 요즘 들어 머릿속을 드문 드문 스쳤을 뿐이다.



내가 '여성'으로서 게다가 '아토피안'으로서 겪었던 중복적인 잣대들과 이런 잣대를 내게 들이댄 세상의 여러 말과 경험은 젊은 여성이던 내가 나의 여성성과 신체를 혐오하도록 어느 정도 부추겼다.


'아토피'라는 질병이 주는 경험은 성별과 나이를 떠나, 같은 고통을 갖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젊은 여성'이 통과하는 '아토피'라는 경험은 다른 특색의 고통을 한 꺼풀 덧씌운다. '젊은데', '여성'이기까지 한 '아토피안'. 사람들은 사회적인 환경에서 나이가 주는 입지 그리고 성별적인 조건에서 나의 문제를 해석하고 염려를 쏟아냈다.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가 던진 '젊은 아가씨가~'라는 말은 여성과 아토피안을 향한 양가적인 사회적 시선을 내포한 채 메시지를 발신한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여진 말들은 '젊은 여성 아토피안'에게 특정한 자아상을 만들어 낸다(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이런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당시의 나는, 여성은 특정한 나이 때에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최상으로 발현할 수 있고, 또 그 '한참'의 나이 동안에만 일궈낼 수 있는 '일반적인 생애주기의 목록'에서 내가 신체적으로 유리하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건강뿐만 아니라 '외모'에도 직결되는 이 질병은 내가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고, 욕망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일생에 얼마 안 되는 '젊은 여성으로서의 시기'에 다가오는 일과 사랑의 기회들을 놓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가슴 아프게 각인시키면서도, 덤덤하게 체념하며 살게 했다.


'젊음', '여성', '외모', '질병'이라는 단어들의 복합적인 작용. '젊은 여성인데, 아프기까지 한', '남들과 다른 피부를 가진 젊은 여성'이라는 잣대는 내가 수용하고 내면화해야 하는 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잘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시선을 그대로 답습하고 문제점을 내게서 찾아들려고 했다. 그럴수록 작아지는 건, 내 자아일 뿐이었지만.  


일생에 얼마 안 되는 '젊은 여성으로서의 시기'에 다가오는 일과 사랑의 기회들을 놓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가슴 아프게 각인시키면서도, 덤덤하게 체념하며 살게 했다.


아토피안에 대한 담론이 필요한 때

이제 나는 안다. '젊은 여성'과 '아토피안(또는 젊고 아픈 사람)'을 향해 쌓아 올려진 시선과 말들이 '정상적 생애주기'에 기초한 말임을. 우리 사회는 이러한 궤도 밖의 삶에 대해서는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들이 내리는 판단 앞에 종속되어 침묵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삶을 적극적으로 고쳐 쓰고 발언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피부가 다 나을 때까지 숨어 살고, 드러나지 않게 살아가는 것만이 아토피안의 길이 아님을. 내가 피부가 낫는 것 외에도 이루고 싶은 욕망이 많은 한 인간임을.


물론 이런 인식이 내게 있다고 해서 세상 아토피안을 보는 시선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뱉어내는 수많은 말속에 어떻게 자신을 견고하게 지킬 수 있는지, 누구를 곁에 두고 누구를 떠나보내야 하는지를 터득하게 된다.


아토피안이 자신의 삶을 관리하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의학적인 처방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증상과 상황이 모두 다른 개개인의 아토피안에게는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재생산해낼 수 있다는 담론이 필요하다. 이러한 담론이 힘을 받고 더 멀리 그들에게 가닿을수록 아토피안은 자신을 살게 하는 동기를 되찾고, 세상의 말에 대응할 수 있는 언어를 갖게 된다. 조금 더 많은 아토피안의 목소리가 세상에 유통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질병이 나의 잘못이 아님을, 젊은데 아픈 이 시간들이 손해이기만 한 것이 아님을, 그 시간 동안 나름의 방식으로 성숙해갈 수 있음을, 우리 삶이 다르다고 해서 틀리지 않았음을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


아프기 시작한 시점과 아픈 것이 '문제'가 되는 시점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늘 아팠지만 그것을 '문제'로, 특히 미래로 나아가는 데 방해물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시점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입시를 준비하던 고교 시절,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진공 속에서 아픈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질서 속에서, '생애주기'의 시간표 속에서, 주변의 기대와 실망 속에서 아프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프다는 것의 의미와 위치에 대한 이야기다. 젊고 아픈 사람들은 눈앞에서 닫히는 문들을 계속 마주하며, 그다음에 대해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정답도 오답도 아닌 각자의 답들을 매일매일 고쳐 쓴다. '젊지만 아픈' 상황을 '젊고 아픈' 삶으로 변환하고자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경청하고 숙고할 때 우리는 미래라는 게 무엇인지, 사회생활의 규칙이 무엇인지, 성인 됨과 젊음의 요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비판적이고 성찰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 / 봄날의 책 / 젊고 아픈 사람의 시간(전희경) 챕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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