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40%를 이 직업으로 살았다니, 어휴 징그러워."
대리 시절 같이 일했던 아트 디렉터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받았다. 툭하면 울면서 일할 때였던 터라 본의 아니게 전우애가 생겨났던 동료였다. 반복되는 수정과 피드백에 지칠 때, 기획 탓을 했다가 광고주 탓을 했다가 결국엔 이 모든 게 결국은 우리가 잠을 너무 많이 잔 탓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버렸던 때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는 사실 그때 새벽 2시, 3시에 퇴근을 했다. 그리고 무조건 8시 반에 출근해야 하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순서대로 그 회사를 그만두고 각자 다른 자리에서 살아갔고 한 번씩 고깃집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다. 1년에 한 번, 혹은 누군가 결혼할 때나 만났지만 그래도 종종 서로에게 소식을 알리며 지냈다.
이번 연락도 그저 그런 안부 연락인 줄 알았다. 그런데 카톡을 읽어보니 디자인을 그만뒀다는 내용이었다. 뜬금없어 보이겠지만 빵집을 열었다고 했다. 앞치마를 하고 모자를 쓴 아트 디렉터의 모습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홍보 이미지라 어느 정도의 연출이 있었을 순 있지만 그래도 좋아 보였다. 빵집이라니,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며 가만히 생각해 봤다.
나의 첫 회사, 첫 동기는 1년을 같이 다니고는 이름만 대면 아는 광고회사에 파견직으로 옮겼다. 그러다 실력을 인정받아 계약직이 되고 정규직이 되더니 10년을 넘게 근무했다. 이직이 무섭다던 그녀는 이제는 또 다른 유명회사에 디지털 마케팅 부서의 주님이 되셨다.
그리고 그 회사에서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기간까지만 딱 채우고 퇴사했던 카피라이터는 곧장 술집을 차렸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했던 AE는 본가인 제주도에 내려갔다.
전우애를 나눴던 회사에는 나랑 동갑내기 아트 디렉터들이 있었다. 이제는 빵집 사장님이 된 아트 디렉터까지 총 4명이서 매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우리들 중 과연 누가 가장 먼저 CD가 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당연히 여자 아트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 당시 내가 봤던 대리 아트 중에 가장 실력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우리들 중 가장 먼저 차장이 되기도 했다.) 그날 우리가 내린 결론은 지금 이렇게 일해서는 우리 넷 모두 CD가 될 수 없을 거라며 노력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내가 가장 먼저 CD가 됐다. 여자 아트는 CD가 될 단계를 앞두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는 남편의 사업을 잠깐 돕다가 이제는 사모님으로, 전업주부로, 두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다.
나 다음으로는 전혀 CD가 될 것 같지 않았던 남자 아트가 CD가 되었다. 비주얼 워크는 좋았지만 천방지축 자기 멋대로였던 탓에 인정받지 못했던 그는 종종 나에게 연락해 CD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토로하곤 했다. 그러더니 어느새 자유로운 회사로 이직을 했고 너무 좋다고 했다. 그리고 최근에 들은 소식은 그 회사에 잘렸다는 거였다.
이렇게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다. 우리가 언제 CD가 될 것이며 CD가 된다고 해서 잘할 수 있겠냐던 대리 나부랭이들 중에 이제 나만 살아남았다.
그런데 문제는 나도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거다.
여기서 이제 더 살아남는다는 건 임원으로 가는 길 밖에 없을 텐데, 임원은 임시 직원의 약자라는 말처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게 문제다.
마흔다섯이 되기 전에는 결정해야 한다.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고 먹여 살려야 할 건 혈혈단신 나 하나뿐이지만, 긴 인생 계속 살아가려면 살아남을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벌써 18년 차, 농담처럼 너무 일을 오래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쌓아온 시간을 버려두기엔 아깝기도 하고 더 쌓아 올리자니 무섭기도 하다.
모두가 그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