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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이력서를 보고 흔들린 날

by coldred

"북카페에서 글 쓰면서 살고 싶어요."



카피라이터 이력서를 받았다. 이력서 곳곳에 묻어난 건, 이 친구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인상이었다. 다양한 플랫폼에 쓴 콘텐츠, 매거진에 기고한 내용, 인터뷰 아카이빙 같은 것들이 그녀를 더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 내용의 깊이나 톤도 인상적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이런 사람이 왜 카피라이터를 지망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먼저 들었다. 생각보다 카피라이터로써의 경력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크게 다가왔던 건 부러움이었다. 노션으로 정리된 이력서이자 포트폴리오를 보며 링크 하나하나를 눌러봤다. 마치 훔쳐보듯 따라가며 생각했다.


이렇게 많이 썼구나. 나도 이렇게 쓰고 싶다.


나도 어떻게든 쓰고는 있다. 퍼블리에 연재 중인 콘텐츠가 어느덧 다섯 번째고 브런치에도 글을 올리고 있다. 뉴스레터를 보내볼까 싶어 새롭게 준비 중이기도 하고. 하지만 돌아보니 늘 업무, 커리어, 콘텐츠 전략 같은 주제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꾸준히 쓰는 사람들을 보면 늘 마음이 움직인다. 그건 성실함에 대한 존경이기도 하고 쌓이는 결과물에 대한 부러움이기도 하다. 그 이력서의 주인도 그랬다. 요리를 좋아한다는 관심사가 글이 되고 아카이빙이 되고, 결국 퍼스널 브랜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뭐가 있지? 뭘 좋아하고 무엇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지? 당장의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글을 쓸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 싶지만, 정작 어디서 뭘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


그래도 20년 가까이 광고업계에 있었는데, 광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이미 그걸로 유명한 사람과 채널이 있고 나만의 무기가 될 수 없다. 게다가 최근 휴대폰 갤러리를 정리하면서 깨달은 게 있는데 지난 1년 동안 내가 수집해 놓은 아이디어들이 없다는 거였다.


평소 길에서 재밌거나 기억에 남을만한 간판은 사진을 찍어두기도 하고 sns에서 본 좋은 문구나 밈을 캡처해놓기도 했다. 그런데 2024년에는 없어도 너무 없더라.


그렇게 마음의 여유가 없었나.


새삼 남의 이력서 하나로 내 지난날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길을 고민하게 되다니.


며칠 전 밀크티를 주문해 놓고 기다리면서 카페를 둘러보는데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군데군데 놓인 식물들은 판매도 하는 거였는데, 문득 사원 때 대리님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북카페에서 글 쓰면서 살고 싶어요."


지금이야 이 말이 얼마나 '단순한 로망'인가를 알지만 책을 좋아하고 글을 좋아하는 어린 나로서는 꽤 그럴듯한, 가능한 이야기처럼 생각됐었다. 북카페는 무슨 돈으로 차리고, 운영은 언제 하고 글은 언제 써?


확실한 건 요새는 아이디어를 내고 캠페인을 정리하는 것보다 글 쓰는 게 더 좋다는 거다. 물론 기획안을 쓰고 초고를 쓰면서 쌓이는 스트레스야 있지만 그래도 글을 쓰는 순간의 몰입이 좋다. 시간이고 앉아서 써도 좋다.


말을 하다 보니 역시, 회사는 이제 아닌 건가. 평생을 직장형 인간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그 끝이 왔나 싶기도 하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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