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金時習)·원호·남효온·이맹전·성담수 등과 함께 모신 서산서원
매번 바뀌는 것이 사람의 마음일진대 그걸 온전하게 평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까. 조선역사에서 충절을 지킨 대표적인 인물들을 사육신, 생육신이라고 부르며 기리고 있다. 적당하게 살아가면 될 것이지만 그들은 목숨을 버리고 벼슬을 버리고 살았다. 경남 함안에 가면 조려를 모신 서산서원이 있는데 1420년(세종 2) 경상도 함안현(현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조안(趙安)의 아들로 태어난 조려는 평소에서 명망이 높았던 사람이라고 한다.
함안군에서 직접 접한 서산서원은 조금은 독특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서산서원은 숙종 계미년(1703)에 경상도 유학자 곽억령 등이 생육신이신 이맹전, 조려, 원호, 김시습, 남효온 등의 병향이 사육신의 예에 따라 이루어짐이 마땅함을 국왕께 상소하여 윤허를 받고 여섯 분의 제향을 위하여 창립한 서원이다.
함안군은 곳곳에 함안조 씨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함안조 씨가 함안에서 세거 하면서 살면서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고 벼슬길에도 나아갔었다.
조려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를 하던 중 세조가 즉위하자 바로 낙향하여 경상도 함안현 산족면 원북리(현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은거했다고 한다. 단종이 살아있을 때에는 원호(元昊), 이수형과 함께 강원도 영월군을 찾아 단종의 문후를 드리기도 했었다.
지금도 함안군에서 거주하는 함안 조 씨의 후손들은 매년 생육신의 충절정신을 기리기 위해 국천제를 열고 있다. '국천제(菊薦祭)'는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살아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다한 이맹전, 조려, 원호, 김시습, 남효은, 성담수 등의 여섯 명의 생육신에게 올리는 제례이다.
그렇게 은거하면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조려는 1698년(숙종 24) 단종이 추복 되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정조 때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서산서원은 향교와 느낌이 상당히 비슷하다. 마치 한 가문의 고택을 연상시키는 건물로 만들어져 있는데 함안 조 씨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고 싶다면 이곳을 방문해 보아도 좋다.
서산서원이 자리한 원북리의 원(院)은 과거 진양 방면의 역원을 뜻하며, 북(北)은 북쪽 위치를 가리켜 ‘역원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종이 사사당하자 문상을 하러 가던 조려는 영월 청령포 앞에 이르러 배가 없어 통곡할 때, 호랑이가 나타나자 조려가 호랑이를 보고 "네 녀석이 충절이라는 것을 안다면 내가 이 강을 건널 수 있게 도울 수 있느냐" 며 하소연하자 호랑이가 그를 등에 업고 영월 동강을 도강하여 문상했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누군가를 기리고 그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의미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12월도 얼마 남지 않은 느낌이 든다. 갈 곳 없는 나뭇잎이 떨어져서 거리에 뒹굴고 있으며 풍경에 황량한 냄새가 나지만 다시 봄이 올 것이라는 기대로 살아가고 있다. 함안의 운치 있는 서산서원에서 생육신이었던 조려가 꿈꾸었을 세상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함안 서산서원
경남 함안군 사군로 1235
055-580-2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