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기로
해명
까닭이나 내용의 진상을 풀어서 설명한다는 의미다.
한 주간이 굉장히 긴 시간으로 여겨질 만큼,
그리고 삽시간에 번진 가을철의 산불처럼
퇴사 이야기가 오가고 난 이후로부터는 모든 관계성이 끊어져버렸다.
작성해야 할 인수인계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가급적 세세하게 정리했으며
이미 다른 후임자에게 모든 업무를 몰기로 결정한 이 조직의 분위기와
인계자들의 "내 일이 어차피 아니니까"의 결정으로 인해
인계자로서 당연히 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흔한 질문이나
현 담당자에게 들은 내용 중 마무리를 요청하는 등의 젠틀한 내용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선택의 문제다. 끊어진 관계를 재구축해야 하는가?
재구축하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만히 있는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어떤 선택을 하던지 선(善)의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무너진 관계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이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지 않으므로
'나가는 놈이 더 지랄이다'라는 흔적을 더 남길 수도 있다.
최악이냐 차악이냐라는 선택이 남아있다면 지혜로운 선택은 어떤 것일까라는 내용으로 고민하다 보니
지난날의 과거가 떠올랐다. 해명이 필요했다면 그들도 듣길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듣길 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나는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이 학문은 연계에서 시작해서 연계로 끝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을 대하는 스킬이나 관계성이 중요하다고 한다. 학부생 시절부터 수많은 대외활동이나 자원봉사를 통해서 내가 일할 곳에 사전 네트워크를 찾아보는 친구들도 있었고, 그것이 곧 재산이 되어서 기관의 직원들에게 눈여김을 받거나 좀 괜찮은 거 같다는 평가를 듣게 된다면 인턴 활동도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뒤에 운과 실력이 모두 따라준다면 정규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 중에 사람의 관계가 개입한다. 모든 직장이 그렇겠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단 기본적으로 관계에서 장점을 가지기 위한 태도와 마인드셋, 하물며 인상과 목소리까지 기관 이용자나 특성에 맞게끔 훈련된다.
하지만 어느 곳에든 빌런이 존재해서, 꼭 이런 관계의 중요성을 역이용하는 부류 또한도 간혹 더러 있다.
이들은 필요하다면 이 분야의 일을 하려면 하다못해 성격도 바꿔야 한다고 믿고 있다.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남을 지적하는데 거침없다.
그리고 주관적이지만 나는 이런 빌런들을 많이 만난 편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하루는 현장 직무에 도전했다가 쓴 패배를 맞고 집에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로
아버지의 친척 관계 중 의사가 한 분 있었는데, 이분의 자녀가 장애를 가지고 있고, 센터의 이사장으로서 신생 스타트업의 위치에서 멤버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엔 지금보다 더 젊었고, 도전적이었다. 더 알아보지도 않은 이 일을 별 고민 없이 수락했고
첫 출근 시 생각보다 너무 괜찮은 시설과 나와는 관계없긴 했지만 아버지의 소개로 만난 친척과의 첫 만남도 나쁘지 않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발언을 듣게 되었다.
"노바디씨, 앞으로 중간관리자 하셔야죠. 혹시나 공부가 더 필요하시면 재정지원도 해드릴 테니 열심히 하세요."
학비는 조금 비싼 것이 아니고, 내 인생에 팀장이나 대리로 불려본 때도 없었기 때문에
너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지금보다 더 역량을 키우려면 어떤 것들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으로 회계도 공부하고 고객 특성도 더 공부해가면서 일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항상 같은 반복된 일만 부여받았고,
이용자 케어나 안전에 관련돼서 필요한 조치라던지,
왜 개인 자차로 송영 도우미도 없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내 소유인 자차로 그들을 케어해야 하는지
조금씩 부당함은 커져갔다.
더군다나 내 월급은 센터에서 직접 주는 것이 아닌
다른 기관에 인력으로 등록시켜서 국가의 보조금을 배분하는 상태
엄밀히 이야기하면 중간관리자는 그저 말 뿐이었고
기관의 차량이나 예산을 더 편성할 돈도 고려하는 상태에서
앞서 교육은 어떻게 시켜준다는 말인가.
허황되다. 그것은 약속이 아니었다. 설사 생각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명확하지 않은 약속은 언제든지 지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배웠다.
"노바디 씨, 이번에 7월에는 채용이 있을 거야. 틀림없으니까 그때까지만 참고해봐."
"여긴 경험을 중요시하고 하니까, 아니 여기서 이렇게까지 한 직원을 안 뽑으면 누굴 뽑아요."
"될 거니까 꼭 지원하세요"
그렇게 이야기했던 직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석인 팀장인 자리도 현재 채용계획이 없으며
당연히 일개 직원인 나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순진했던 탓인가, 어리석은 탓인가
미래에 대한 내용은 언제나 달콤하고 속기 쉽다.
그리고 이 내용을 확신하고 있었던 사람들의 그 말들은
어느새 누구도 기억하고 있지 않으며
자신이 불어넣은 희망이나 기대감으로 인해, 그 말을 실제로 믿었던 사람에게
"이렇게 될 줄 몰랐지. 뭐 그건 아쉽게 됐어"
라는 말이면 이 복잡했던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거 같다.
미래를 생각하게 했던 그 말들은 다시 사라진다. 그리고 남은 선택지 중엔 선은 없고
최악과 차악이 남는다.
중간관리자를 약속했던 그 자리와 그 직무 당시엔
공공장소에서 이용자가 갑작스럽게 불편함과 큰 행동들로 인해서 나 혼자서는 케어가 힘들어져 그 친척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현장으로 온 친척은 '이까짓 일로 상사를 오라 가라 한다.'
'사실 능력이 없었던 거 아니냐'라는 말을 들었고
더 이상 참지 않은 나는 그 자리에서 일을 그만둔다고 의사 표명 뒤에 다음날 사직서를 제출하고 영영 그 친척과는 만나지 않는 결정을 했다. 역시 성숙하진 않았지만 없어진 미래와 보장에 대한 나름의 분노 표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현재 다시 또 일을 정리하면서
현재 거래처가 제출하지 않고 갈등관계를 애써 막아가며
수정을 거듭해왔고 문제를 조기에 차단한 이야기는 관심 없고
그럼 앞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꾸어야 할 계획서가 정말 효과적일 것인지
왜 그것까지 생각해서 지금껏 일을 하지 않았는지 물어보는
이 날 선 인간을 지켜보면서
이 산업은 정말 5~6년의 시간이 흘러서 워라벨 시대,
인간 중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에도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거짓으로 약속해보며
일이 여의치 않을 땐, 이렇게 책임 소재만을 추궁하는 행태를 보이겠구나
앞으로도 이 관계의 우위를 통해서 사람을 이용하는 문화는 전혀 바뀌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최악과 차악
나는 앞으로도 둘 중에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겠다.
그리고 쉽사리 미래를 확신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남은 3일 동안
떠나가는 사람으로서 떠나가기 전에 일에 펑크가 생기지 않을 수 있도록 현황이 필요한 일을 정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