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가지 부정적인 생각
조금은 쓸쓸하게도 퇴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루어졌다. 몇몇 인원과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깊지 않았다. 무미건조하게도 그러나 그중 다행이게도
" 그동안 일만 하고 가는 거 같네요. 고생했어요."
라는 씁쓸하고도 선선한 위로와 함께 약 8~9개월간 근무했던 자리를 비우고 돌아서 나왔다.
익숙했다. 이런 일들은 늘 겪어왔던 일이다. 어딘가를 떠나는 것은 정말 익숙한 일이다. 다만 마지막까지 웃을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그 뒤로 여러 날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 시간 동안 나를 좀 살펴야겠다고 생각해서 회사 다니는 동안 그렇게 주말마다 좋아했던 등산을 맘 편히 다녀오리라 생각했지만 정말 의외로 실천하지 않았다. 날씨가 더워진 탓이리라. 마음이 무너진 탓이리라.
다만 평소보다 더 빠르게 흐르는 시간은 회사를 다니던 이전과 분명히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단지 나만 그대로 인 것 같은 느낌으로 하루를 마무리 짓곤 했다.
빠른 시일 안에 마음을 회복하고 다른 일을 잡아가자라고 결심했다.
그에 비해 글은 쓸 수 없었다. 이때는 기존에 있었던 부정적인 마음 등이라던지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어딘가가 빠져버린 기운에 밥을 먹기도 싫고, 글도 쓰기 싫었고 일상생활이 무너짐을 느꼈던 나날이었다.
하기 싫은 일을 내 손으로 끝냈기 때문에 한동안은 통쾌하리라. 할 일을 다했다는 생각으로 후련하게 지낼 수도 있었겠지만
어쩐지 남아있는 찝찝함이 컸다. 다시 또 인간관계에서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며 또 이런 일을 겪음으로 인해서 이젠 그동안 공부해왔고, 약 5-6년의 시간 동안 내 삶의 일부라고 고민해왔던 이 산업, 사회복지라는 분야를 포기해야 할 거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겠다.
언급했다시피 나는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첫 취업은 당연하게도 사회복지시설에 취업하고자 했다.
조금은 특수하게도 아동보호전문기관이라는 곳에 정말 안면도 없었던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서 지원서를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절 대학생이 작성할 수 있는 최선의 이력서를 작성했으나 늘 글의 소재나 짜임새를 가지고 교수의 핀잔을 먹어가면서 (그리고 그 점을 기분 상해하면서) 여차저차 서류에 합격했고 처음으로 서울에 면접을 치르러 기차와 버스를 사용해가면서 면접을 보고 정규직 취업을 일찍 따낸 편이었다
당시는 2014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시절 연락하고 지냈던 후배들은 그래도 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알법한 기업에 취업했다는 사실을 부러워했고, 나 또한 대학생활 나름 성실하게 생활한 보상을 받는구나라고 여겼다.
첫 출근을 한 찰나, 아아 이게 어쩌면 기업에 대한 세밀한 조사나 정보를 파악하지 않은 내 인생의 치명적인 실수가 아니었을까를 깨달았다.
그만큼 사회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끝없는 자괴감이었다.
첫 직장의 키워드를 결론만 이야기하면 자괴감이다. 학대죄라는 범죄에 대응하여 해당 내용을 조사하여야 했고, 경찰과 협의할 일이 많았지만 실제로 내가 조사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이라는 생각부터 자괴감은 시작했다. 그만큼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업무에 녹아들어 있어야 할 법조문은 생소했고 피해자는 억울했고 피의자는 표독했다.
당시 피의자라고 본다면 80% 이상이 부모로 인한 학대가 발생했는데, 그 유형도 다양하게 존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서학대, 그리고 학대행위에 대한 내용에 대한 강한 부모의 강한 부정은 항상 상담에서 도출되었으며 지금은 법적으로마저 금지된 징계권에 대한 내용을 당시엔 당연히 부모가 가진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훈육과 학대를 구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조사원들을 가정 해체와 파괴에 기인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들의 입에서는 감사보다는 분노가, 협조보다는 무시가 짙게 깔려있었다.
나날이 그 횟수는 늘어났고 나는 멱살 잡힘과 욕설을 받는 그 늘어난 횟수만큼 내가 이 일을 잘하지 못하는구나를 느꼈다.
자괴감이라는 것은 또 다른 자괴감으로 번식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비교적 누군가의 소개로 수시로 얻은 기회가 하찮게 느껴졌다. 뒤이어 입사하는 친구들이 가진 생기가 부러웠다. 그들은 어려운 필기와 여러 과정을 거쳐서 훈련된듯 보였고, 그렇게 정규직원으로 부임한 것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느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몰랐다.
업무로 인해 철야도 경험하고, 피해신고 전화에 주말도 없이 조사를 나가며 가족들과의 시간도 없었던 그때, 나도 할 수 있는 만큼 버텼고 고민했으니 정말 나도 잘한 것이라고 나를 조금이라도 인정할 여유가 없었던 때가 기억이 난다.
가장 못났던 때를 기억하면서
현재는 지금까지 글을 쓰며 정리했던 그 일을 그만 둔지 약 2주도 채 되지 않았지만 다른 계약직 일을 구해서 다시 일을 한다.
그전과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당시에 보고 해결하지 못했던 모든 사건들을
법으로 처리하거나 진정으로 힘이 되어주었던 민생의 치안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가 복지에 적응하지 못했고 이만큼 성과도 내지 못했다면 성과를 낼 수 있는 곳으로 가리라.
복지보다는 보호의 개념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던 때를 다시 찾으리라.
복지 속 모호함보다는 법절차의 명확성이 보다 더 간결하고 매력 있게 다가왔다.
당시에는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어 늘 부모님에게 죄를 짓고 사는 심정으로 공부했다가
맘처럼 성적이 나오지 않아 좌절했었고 그 뒤로 2-3년이라는 세월이 마냥 흘러버렸지만
이렇게 꿈이 다시 고개를 드는 이유가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한다.
새로운 결심을 하고
그에 맞는 준비를 한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