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옥수 Jan 22. 2024

책임

끝나지 않은 직장생활

“여기에 왜 내 이름이 들어가야 하나요?”


새로운 팀장이 한 이야기다. 어떤 주제에서 이 말이 나왔는지라고 물어보신다면


단지 실무책임자로서 청렴할 것인지, 책임을 다해서 사업을 잘 추진할 것인지에 대해 간단한 서명을 받는 일이었다.


큰 의미가 담기거나 100억 사업비에 대한 계약서에 서명하는 일도 아니었다.  


팀장이라는 사람은 이곳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다는 것을 즉각 항의하기 시작했고


3회 이상, 담당 운영 직원을 찾아가 항의했다고 한다.


왜 사업 실무자인 글쓴이를 서명란에 넣지 않는지를 항의했다고 한다.


운영팀의 직원은

사업실무자인 내가 업무를 추진한다고 해도 결국 보고를 받고 책임을 지며 결정하는 역할은 팀장이지 않는가를 피력했지만


그런 이야기가 이 사람에게는 들릴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운영팀 직원은 분개했고

팀장은 결국 내 사인을 받아갔고

나는 입을 다물게 되었다.


응당 사람은 책임을 지려고 한다. 그게 직분이 달린 일이든 관계없다.


자신이 한 일에는 자신이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게 맞다. 피하고 싶은 일이 있더라도 다시 죄를 고백하면서 돌아오는 자는 그래서 귀하다.


자신이 벌인 일이라고는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통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예측할 수 있듯이


우리가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점점 부유해지고 세상에서 서로 속여가면서 잘 살게 되더라


부여받은 일 없이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누려가면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우린 신을 찾고 원망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잘 산 거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죄가 없이 살려고 노력하는데,


왜 저들은 저러해도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처벌을 받아야 공정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고 곧잘 원망한다.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이 차라리 편해서일까


그래야만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을 것이라서 그런 걸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을 벌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그렇게 해서는 안될 일이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반성하려고 하고 틀린 부분이 있었다면 사과해 가면서


업무관계든 무엇이든 어떻게든 좋게 풀어가려 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류의 모든 모습들은 나에게 주어지는 경고다.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일 때, 나는 팀원들을 잘 챙길 수 있겠는가.


신이 내게 질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잠시동안 오해했었다면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을 텐데


이미 작게나 크게나 쌓일 만큼 쌓이는 오해는 더 이상 풀 수 없을 지경까지 쌓이게 된다.


그게 인간관계다.


그 또한 하지 못할 이유가 뭐 그렇게 대수였을까


다시 경고를 잘 반영해서 살아가본다.

작가의 이전글 호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