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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Aug 20. 2020

촛불 혁명이 만든 네거티브 사회

전광훈 목사는 왜 ㄱㅅㄲ가 되었는가!

네거티브 사회에는 지지와 반대만 있을 뿐, 그 실체가 없다. 이익이 곧 생존이 되어 버린 사회,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는 없는 사회에서 지지와 반대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서초동과 광화문, 숫자 싸움에 빠진 정치권 (머니투데이, 2019/10/5)

시민의 승패가 단지 쪽수에 의해 결정된다면, 우리는 과거, 그 어느 시대에도 쿠울~하게 패배를 인정했어야 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의 탄핵을 부결시켰다면, 박근혜의 탄핵을 주장한 이들 중 “법의 판단이니 냉정하게 따르자.”라고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가끔씩 지지와 반대의 명분으로 소환되기도 하지만 이 사회에서 절대적이면서 객관적인 진리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자리를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이익이 자리를 잡았다. 주관과 이익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주관이 없다면 객관도 존재할 수 없으며, 원래 선의 어원은 이익이 된다는 아가톤(agathon)에서 나왔으며, 반대로 악의 어원은 해가 된다는 의미의 카콘(kakon)이다. 다만 지지와 반대의 명분으로 객관이니, 진리니 하는 말만 내세우지 않으면 된다. 그저 내 이익에 도움이 되거나 취향이 맞기 때문에 지지하고, 내 이익에 해가 되거나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반대할 뿐이다.


난 이것이 촛불 혁명이 가져온 부정적 이면이라 생각한다. 촛불 혁명의 과정에서 어떤 시민은 승리했지만, 어떤 시민은 처절하게 패배했다. 패전국에게 전쟁 보상금을 물려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못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는 승리에 취해 촛불 혁명을 통해 상처 받은 ‘무고한 신념’을 살피지 않았다. 오히려 혐오하기에 바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고, 보편적인 상식조차 갖추지 못한 수구 꼴통이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상처를 얼마나 입었는지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빤스 목사로 잘 알려져 있는 전광훈, 물론 적절한 비유는 아니었지만 전광훈 목사는 빤스 발언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여집사와 불륜관계에 빠진 목사를 비판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목사가 여집사와 불륜관계에 있었다. 그 목사가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나는 책임 없습니다. 집사님이 꼬셔서… 나도 피해자입니다’ 라며 모든 책임을 성도에게 돌렸다더라. 나는 그 목사의 잘못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성도들이 목사 좋아하는 것은 선이 없다. 성경책을 보면 성도들이 사도 바울에게 눈까지 빼준다. 생명도 바친다. 우리 교회 집사님들은 나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빤스 벗으라면 다 벗어. 목사가 벗으라고 해서 안 벗으면 내 성도 아니지. 그런다고 해서 집사들에게 책임을 지우면 되겠느냐’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한 발언이다(박수진 기자. 2011/9/27. “전광훈 목사가 밝히는 ‘빤스 발언’의 진실”. 한겨레 신문).”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누군가는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일보와 똑같은 방식으로 전광훈을 빤스 목사라고 공격한 것이다. 왜? 전광훈은 ㄱㅅㄲ니까... 아무리 똥개라도 자신이 싸지도 않은 똥으로 인해 욕을 먹는다면 억울할 수밖에 없다. 갑자기 두렵다. 혹시 전광훈을 ㄱㅅㄲ로 만드는데 나도 일조한 것은 아닐까?


김어준은 뉴스공장에서 박영선과 나경원의 토론이 편파적이라는 나경원 의원의 불만에 자신은 원래 편파적이라고 대답했다. 워낙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언론이 편파적으로 사실을 다뤄온 것을 알기에 난 김어준의 그 말에 쾌감을 느꼈다. 악마와 싸우려면 악마가 되라고 했던가? 우리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진보나 보수나 모두 악마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 악마들이 천사 코스프레를 하고 있으니 청년 세대들의 눈에 기성세대들 모두가 꼰대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수구라는 악마와 싸우다 악마가 된 것처럼, 그들도 기성 꼰대와 싸우는 과정에서 젊은 꼰대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프레임은 선과 악이 아니다. 누가 더 꼰대스러운가의 대결 구도다.


얼마 전 캣맘으로부터 ‘개소리’라는 말을 듣고 혼자 웃픈 고뇌에 빠진 적이 있어서, 전광훈을 아무 죄 없는 개에 빗대는 게 진심 미안하지만, 나 또한 전광훈을 천하에 미친 ㄱㅅㄲ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책임을 전광훈이라는 한 인간에게 모두 전가하는 것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ㄱㅅㄲ와 싸우다 보면 나도 누군가한테 ㄱㅅㄲ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은 왜 전광훈이 ㄱㅅㄲ가 되었는지 사회 구조적 문제를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적 책임으로부터 나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표지 사진 : www.namu.m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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